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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지 Jan 13. 2018

칠레 푸에르토 몬트,
나 여기 왜 왔니

찰나의 선택으로 인해 여정이 꼬이고 또 꼬이다 

지난 글에서 나는 원래 칠레가 내 여행 계획에 전혀 없었다는 이야기를 언급했었다. 원래 내 계획은 볼리비아 우유니에서 바로 아르헨티나 살타로, 그 다음에 멘도사로, 그 다음에 바릴로체로, 그 다음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루트를 따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칠레에 가게 된 이후로 새로운 여행 계획을 세우게 됐는데, 여권/지갑 분실사태 이후로 칠레 산티아고 다음의 여행 루트를 자세하게 짜고 이것저것 조사할 여유가 없었다.

 내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산티아고에서 바로 국경을 넘어 아르헨티나 멘도사-바릴로체-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갈 것인가 혹은 산티아고에서 더 칠레 남단으로 내려간 후 그 곳에서 아르헨티나 바릴로체로 국경을 넘을 것인가.

 아직도 후회가 남는 점 중에 하나인데, 나는 첫 번째 루트를 선택했어야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두 번째 루트가 내 선택을 받았다.

 산티아고 공항으로 가서 국내선 스카이 에어라인(SKY airline)을 타고 칠레 푸에르토 몬트(Puerto Montt)로 향했다. 왜 하필 이 곳이냐고? 내가 가져간 남미 가이드북에도 이 곳 얘기가 있었으므로 당연히 볼 게 꽤 많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푸에르토몬트 공항에 도착했다. 남단에 위치한 만큼 추운 곳이고, 독일 이민자들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다 보니 공항도 목재의 느낌이 많이 나는 디자인이다. 공항 기념품점 곳곳에서 털모자, 장갑, 머플러 등등 따뜻해보이는 방한용품을 많이 팔고 있다.

푸에르토몬트 공항에서 시내(푸에르토몬트 버스 터미널)까지는 거리가 꽤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항 셔틀을 타고 시내 버스 터미널로 이동한다. 약간의 요금을 내고 이동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처음 구글 맵에서 푸에르토 몬트 버스 정류장을 검색했을 때 지도에 두 군데가 검색이 되길래 어느 곳이 맞나 혼란스러웠는데, 참고로 진짜 버스 터미널 주소는 Diego Portales 2000이다. 

푸에르토 몬트에서 나는 특별한 계획이 없었으므로 딱 1박만 하고 곧바로 아르헨티나 멘도사로 가는 버스 티켓을 사려고 했다. 그런데 터미널의 온갖 창구를 돌아다녀봐도, 바로 다음 날 떠나는 버스 스케줄이 없다는 것 아닌가. 여기서 또 멘붕을 겪었다. 이 할 일 없는 마을에 갇히게 되다니. 아쉬운대로 그 다음 날 바릴로체로 가는 버스표를 샀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부디 인터넷 홈페이지로 구간과 스케줄을 확인하시길. (m.andesmar.com)에 들어가면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오가는 버스, 그리고 아르헨티나 내의 장거리 버스 노선 스케줄을 검색하고 버스표를 구매할 수 있다. 

지금 검색해보니 푸에르토 몬트에서 바릴로체로 가는 버스는 일요일, 화요일, 금요일에만 운행한다.


예약해 둔 숙소에 갔다. 내 숙소는 Hostal Benevante. 버스 정류장에서 겨우 두 블록만 위로 올라가면 되는 위치인데, 오르막길이 심하고 배낭 무게가 무거워서 어찌나 멀게 느껴지던지. 더군다나 너무나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 유령마을 같은 푸에르토 몬트의 첫인상이 더더욱 내 어깨를 짓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대부분 푸에르토 몬트를 찾는 관광객들은 시내를 둘러본다기보다는 (시내에는 볼 게 없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자연경관 트래킹을 하러 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곳에 정을 주지 않고 잠깐만 머물다 떠나갈 예정이어서 시내에 숙소를 잡았다.

 숙소의 느낌은 상당히 아늑하고 깨끗했다. 다만 밤이 가면서 너무 추워졌을 뿐. 한국의 온돌 난방 시스템이 그리웠다. 주인 아주머니께서 기름 난로를 방에 가져다 주셨지만, 기름냄새가 너무 많이 나고 내부 공기가 굉장히 건조해진다. 

 저녁을 뭘 먹어야 할까, 생각하는데 내 방 창문 너머로 숙소 바로 건너편에 있는 스시집이 보였다. 

숙소 바로 건너편의 Japon del Lago 스시집. 알고 보니 칠레 사람들이 상당히 스시나 롤을 즐겨 먹는다. 특히 아보카도 롤을 어쩜 저렇게 예쁘게 마는지, 황량한 곳에 와서 기분이 안 좋은 참에 저녁은 맛있게 먹었다. 우리나라에서라면 당연히 공짜로 주는 미소수프도 여기서는 돈을 내고 먹어야 한다는 건 함정. 그리고 칠레 물가는 절대 싸지 않다. 

다음 날.

절대 어두운 필터를 깔거나 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나 황량하고 으스스하고 스산하고 을씨년스럽고 유령마을 같은 푸에르토 몬트, 실화냐.

가이드북에 의하면 독일인 이민자들이 정착해 사는 마을이라서 푸에르토 몬트 특유의 목재 건물 외벽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마치 물고기 비늘 모양 같은 나무판을 덧대서 건물 외벽을 만드는 건데... 우중충한 날씨가 더해지면서 왠지 차갑고 쓸쓸한 느낌을 준다. 

한때는 예쁜 집이었을 것 같은데 여긴 아무도 안 사는 것 같았다. 

큰길가로 나가니 바다가 보인다. 버스 터미널이 있는 바로 그 곳이다. 

어디를 갈까, 서성였지만 주말이라 그런지 문을 연 곳이 거의 없다. 돌아다니는 시민들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가이드북에 따르면 독일식 케이크나 파이, 독일식 요리를 하는 곳이 몇 곳 있다고 해서, 드디어 문을 연 곳을 발견했다. 기대 이상으로 예쁘고 따뜻하고 친절한 곳이었다.

무슨 파이였는지, 또 무슨 음료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무튼 친절한 직원들 덕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 동안 쓰지 못했던 밀린 일기도 한 편 썼다. 

나와보니 제법 어둑해졌다. 

이 동네 사람들은 다 어딜 간 걸까? 다 각자의 집에서 가족들과 주말 밤을 보내고 있는 거겠지? 하고 생각하던 참에, 그냥 별 생각 없이 대형 쇼핑몰에 들어갔다.

세상에. 대반전.

온 동네 사람들이 쇼핑몰에 꽉 들어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해변가에 위치한 쇼핑몰은 흔히 보던 대형 쇼핑몰 2~3개를 합쳐놓은 크기의, 매우 복잡한 구조의 쇼핑몰이었다. 바로 이 곳이 푸에르토 몬트 주민들의 주말 핫플레이스였구나. 다들 어딜 갔나, 동네를 유령 마을로 만들어놓고 다들 어디로 사라졌나 싶었더니 모두 쇼핑몰에 모여있는 것이었다. 바깥이 완전히 텅 빈 유령마을인 것과 대조적으로 이 곳은 엄청난 인파로 북적북적대고 활기가 넘쳤다.

오랜만에 옷도 구경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날씨가 추워진 곳에 내려온 기념으로 따뜻한 털모자도 하나 사고, 숙소에서 먹을 스시 세트도 테이크아웃 해서 쇼핑몰을 나왔다. 

귀여워라. 커다란 개들이 각자의 박스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추위를 피해 잠을 자고 있다. 

창틀에 무슨 안내판이 붙어있다.

너무 귀여워서 팻말을 찍어봤다.

"강아지들의 상자를 뺏어가지 마세요. 강아지들이 춥답니다. 감사합니다."

어느 마음 따뜻한 사람이 동네 떠돌이 개들을 위해 잠을 잘 수 있는 상자들을 자신의 집 밖에 마련했나보다. 

남미에 오래 있다보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둔해지는 풍경이지만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는 얼마나 있을 수 없는 풍경인지. 

Club Aleman. 말 그대로 독일 클럽이다. 푸에르토 몬트에서 가장 유명한 독일 식당/펍인데 혼자는 들어갈 엄두가 안 나서 간판만 찍어 봤다. 


휴, 액티비티나 투어를 할 일정도 안 되면서 내가 여길 왜 왔던가.

쥐 죽은 듯이 거의 모든 객실이 텅텅 빈 숙소에 돌아와 방문을 꼭 닫고, 난로 불을 쬐면서 푹푹 한숨을 쉬었다. TV에서는 스페인어로 더빙한 디즈니채널의 어린이 드라마가 나온다. 

여길 말고 멘도사를 갔더라면, 와이너리 구경이라도 갔을 텐데... 하는 후회가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꿀꺽꿀꺽 삼킨다. 어쩌면 나는 휴식이 필요했는지도 몰라. 지금까지 너무 지나치게 숨가쁜 일정을 소화했으니 이제 잠시라도 좀 쉬라고, 신께서 일부러 이런 할 일 없는 고립무원의 상황을 만들어 줬는지도 몰라. 하면서 스스로를 달랜다.


내일은 푸에르토 몬트를 떠나 바릴로체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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