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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지 Jan 13. 2018

아르헨티나 바릴로체에 입성하다

엘사가 살 것 같은 겨울호수의 마을

푸에르토몬트(Puerto Montt)를 떠나 기대하던 아르헨티나 바릴로체(Bariloche)로 떠난다.

이 지역은 전부 크고 작은 호수들이 많은 곳이다. 연중 서늘하고,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오는 곳이라 설경을 즐기기 좋은 지역이다. 우리가 흔히 '남미'하면 떠올리는 뜨겁고 열정적인 분위기와는 딴판이라서 매력적인 곳이다.

푸에르토몬트부터 바릴로체까지 한 6시간 정도의 거리였던가.

버스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사진을 찍어 봤다. 

도로 표지판이 이만큼 잠길 정도로 눈이 내렸다. 

사람 한 명 없는, 오직 산과 호수와 눈 뿐인 자연이 계속 펼쳐진다. 

엄청나게 쌓인 눈을, 딱 차가 다니는 도로 부분만 파낸 듯하다. 어마어마한 눈의 두께에 놀라서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지층 같다. 

이 많은 눈을 도로에서 치우는 것도 일이었겠다. 버스에서 내려서 저 깊은 눈에 발을 푹 담가보고 싶었다. 

라고, 생각하던 참에 국경 지대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렸다.

질척질척대는 눈을 피해가며 출입국사무소에 들어가 출입국수속을 했다. 

저 멀리까지 산이 보이고 산에 내려앉은 구름이 보인다. 너무 아름다운 국경이다. 

칠레에서 받은 임시 여권을 보더니 직원이 "무슨 일이야? 잃어버렸었어요?" 하고 묻는다.

볼리비아-칠레 국경을 넘을 때의 답답했던 공기와 느린 시스템의 기억 때문인지, 참 오랜만에 쾌적하고 매끄러운 입국 수속을 밟아본 듯했다. 

다시 출발.

이처럼 가는 길 곳곳에서 호수를 볼 수 있다.


약간은 이른 저녁 시간에 바릴로체에 도착했다. 바릴로체 버스 터미널에서 바릴로체 시내(Centro Civico)까지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다는 얘기를 가이드북에서도 보고 여러 블로그에서도 봤지만, 어쩐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음 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갈 버스표를 구입하고 택시 승강장에서 택시를 기다렸다.

 택시를 기다리는데 한 외국인 청년이 말을 건다. 혹시 시내(Centro Civico)까지 가는 거면 자기 친구와 함께 택시를 같이 타자고 한다. 흔쾌히 오케이 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너는 아르헨티나 여행 중인거니?"

"아르헨티나에만 온 건 아니고. 집을 떠나온지 오래 됐어. 멕시코에서 시작해서 남미를 쭉 훑어 내려왔어."

"(깜짝 놀라며) 그런데 생각보다 가방 크기가 작네?"

"응. 원래 여기 보조 가방이 하나 더 붙어 있어야 하는데, 멕시코 공항에서 잃어버렸거든."

"아이고 세상에..."

"괜찮아. 난 지금 여권도 없어졌고 지갑도 없어졌는데 그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 헐?!?!?!"

엄청나게 놀라는 청년 앞에서, 나는 어느 덧 꽤 여유롭게 "다 잃어버려도 괜찮다, 다 잘 될 거다"하고 말하는 (일단 겉보기에는) 베테랑 여행자가 돼 있었다.


 내 숙소는 Hostelito. 저렴하게 바릴로체를 여행하실 분들에게 추천, 또 추천드리고 싶다. 숙박비가 매우 저렴하면서도, 도미토리에 라디에이터를 아주 뜨끈뜨끈하게 틀어놔서 추운 바릴로체에서도 아늑하게 잘 수 있고, 주인 아저씨도 굉장히 친절하시다. 무엇보다도 Centro Civico하고도 매우 가깝다. 

여기가 Centro Civico. 바릴로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랜드마크다. 

압도적이고 위엄있다기보다는 아늑하고 귀여운 느낌의 건물과 광장. Centro Civico 뒤쪽으로 가면 바릴로체의 중심가가 나타난다. 

도착 기념으로 셀카 한장. 이제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챙겨온 얇은 패딩을 입기 시작했다. 칠레 푸에르토몬트에서 산 보라보라 비니도 여기선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아르헨티나에 오면 첫 끼로 꼭 스테이크를 먹고 싶었다. 아르헨티나는 소고기로 유명하니까 꼭 소고기를 먹어야 겠다고 생각했던 것. 바릴로체를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단연 가장 많이 나오는 유명 스테이크 맛집, El boliche de Alberto(일명 알베르토 스테이크)에 갔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유난히 저녁식사를 늦게 하는 편이다. 그래서 저녁식사 오픈 시간이 무려 8시다. 

8시가 되기 전에 식당 앞으로 갔는데 역시 소문난 맛집답게 이미 줄이 서 있다. 그래도 줄의 앞쪽에 선 편이라 곧바로 입장해서 자리를 안내받았다.

무려 스테이크집에 혼자 간 사람도 나밖에 없고, 동양인도 나뿐이었다.

이 곳은 굉장히 고급스러운 분위기라기보다는, 테스토스테론이 흘러넘치는(?) 분위기의 식당이었다. 

건장한 오빠들이 팔뚝을 걷어부치고 불길이 활활 솟아오르는 그릴에서 사람 얼굴만한 고깃덩어리를 굽고 있는 광경을 테이블에 앉아서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서빙을 할 때도 턱시도를 빼 입은 웨이터가 조심스레 접시를 내려놓기보다는, 집게로 피가 뚝뚝 흐르는 고깃덩이를 덜렁 집어서 내 접시에 놓아주는 곳. 마치 산골짜기 산적 두목의 생일파티에 온 기분이 난다.

주문한 Bife de Lomo (Tenderloin Steak)가 나왔다. 육즙 뚝뚝!

맛있다. 사진에는 그다지 맛있어 보이지 않겠지만, 그 동안 먹어 본 스테이크 중 가장 맛있었다. 서울에서 이렇게 먹으려면 내가 감당 못할 값이겠지만 여기선 320페소라니.

남미 사람들은 우리처럼 고기를 먹을 때 꼭 채소를 필수로 곁들여 먹어야 한다는 관념이 잘 없는 것 같았다. 많은 테이블에서 스테이크와 함께 감자튀김(Papas Fritas)을 시켜서 먹는 걸 보고 깜짝 놀람. 나는 샐러드를 꼭 같이 먹어야 겠다고 생각해서 Lechuga(상추)를 주문했는데, 여기서 또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처럼 예쁘게 세팅한 양상추 샐러드가 나올 줄 알았는데, 커다란 비빔밥 양푼에 문서 파쇄기에 집어넣은 것처럼 길쭉길쭉하게 잘린, 그리고 다른 채소는 아무 것도 더 넣지 않은 그야말로 '생' 상추 샐러드가 한가득 담겨서 나왔다.

진짜로 산적 생일파티에 놀러와서 갓 잡은 멧돼지를 굽고 갓 따온 산야채를 무쳐서 상차림을 낸 것 같았다.


여기서 또 정말 아쉬운 건, 내 여행 일정이 완전히 꼬인 탓에 바릴로체에서 딱 1박 밖에 머물지 못한다는 것이다. 최소 3박은 머물면서 호수도 구경하고 산에도 올라가고 싶었는데, 원래 바릴로체는 그러기 위해 오는 곳인데, 나는 또 여기서 싱겁게도 시내 구경만 하다가 바로 떠나게 됐다. 


따뜻하고 아늑한 숙소에서 휴식을 취한다. 스키 여행을 왔다는 귀여운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온 모자가 있다. 내가 아르헨티나를 떠나면 곧 리우와 상파울루로 갈 계획이 있다고 얘기해주자 짧은 영어로 "상파울루엔 별로 볼 게 없어"라고 얘기해주는 귀여운 엄마와, "내가 몇 살로 보여요?" 하고 수줍게 묻는 귀여운 아들. 그리고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온 청년. 보고타에도 가 보고, 칼리에도 가 봤다고 하니까 어디 도시가 더 좋더냐고, 소문대로 칼리 사람들은 살사를 그렇게 잘 추더냐고 귀엽게 신경전을 벌였었던.


다음 날에는 바릴로체 시내 구경을 좀 더 하고 드디어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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