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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지 Jan 29. 2018

이 밤, 온 세상의 에너지를 모아:
푸에르자 브루타

What a night, and What a performance!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국립 미술관에서부터 오늘 밤 관람할 푸에르자 브루타 전용 공연장이 있는 곳까지는 가까운 거리라서 걸어갔다. 이제는 팔레르모(Palermo) 동에서 레콜레타(Recoleta) 동으로 넘어온 셈이다. 

 사진 속 보이는 노란색 건물은 굉장히 다양한 기능을 한꺼번에 담고 있는 문화공간 같은 곳이다. 정확한 정보를 모르기에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저 안에 푸에르자 브루타 공연장도 있고, 하드록카페를 비롯한 여러 식당이 있고, 무엇보다도 지하에는 Buenos Aires Design이라는, 로컬 디자이너들의 상품을 모아놓은 거대한 쇼핑몰도 있다. 

 내가 갖고 있던 가이드북에서도 소개된 Buenos Aires Design의 내부다. 세련된 디스플레이로 가구, 인테리어, 생활용품, 인테리어 소품 등등 다양한 디자인 제품들을 찾아볼 수 있다. 내부 사진촬영이 금지인데, 나는 다가와서 직원이 알려주기 전까지는 금지인 줄도 모르고 사진을 몇 장 찍어버리고 말았다. 일반 상점이 아니라 하나하나 디자이너들의 작품이라 사진 촬영을 할 수가 없는 듯하다.

 주머니 가벼운 배낭여행자가 여기서 볼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싶어서 금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역시 바깥에 내게 더 어울리는 장소가 나타났다. 

 여기는 Plaza Francia. 매주 토요일, 일요일마다 수공예품 장터가 열리는 광장이다. 약 30년 전부터 수공업자들에 의해서 형성된 수공예품 페어라고 한다. 이 곳의 상인들 역시 자신들이 만든 제품들이 사진 찍히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먼 발치에서밖에 찍을 수 없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기념품을 사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나는 단연 이 곳을 추천하고 싶다. 하나 같이 '아르헨티나스러운' 물건들인 데다가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아기자기하기까지 하다.  


 이건 나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 곳에서는 아무나 자기 물건을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면(feriaplazafrancia.com) 각 수공예 분야별로 어떤 장인들이 물건을 내놓고 있는지 그 장인의 이름들과 구체적으로 생산하고 판매하는 항목들을 확인할 수 있다. 도자기, 순수미술, 가죽, 금속, 기타 재료(유리공예, 모형, 악기, 칼레이도스코프 등등), 섬유, 목공 이렇게 크게 일곱 분야로 나뉜다. 사고 싶은 게 너무 많았는데, 나는 역시 남미 도시를 돌 때마다 귀걸이를 한 쌍씩 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예쁜 귀걸이 3쌍을 기분 좋게 구매할 수 있었다.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라 보까/까미니또에서 아르헨티나와 관련된 기념품(축구팀 유니폼, 열쇠고리, 마그넷, 탱고 댄서가 그려진 관광객들 상대의 기념품들)을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여행기에서 다루겠지만 나도 그 곳에서 엽서를 샀기 때문에 이를 비난하거나 비웃을 생각은 없다. 다만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에 꼭 추천하고 싶다. 정말 독특한 데다가 공장에서 찍어낸 듯 천편일률적이지 않고, 무엇보다도 지역경제와 문화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기념품을 사기에 이만한 곳은 없는 것 같다. 


 사실, 굳이 우리가 찾아주지 않아도 이미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이 그 물건들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많이 찾아주고 있고, 이 물건들을 직접 만들고 파는 장인들의 얼굴에서도 그 도도함과 자부심이 잔뜩 느껴진다.

수공예품 장터 바로 앞의 이 성당은 Iglesia Nuestra Senora Del Pilar라는 이름의 천주교 성당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새하얀 외관이 인상적이었다. 성당 문을 북적북적하게 드나드는 사람들로 보아 한 눈에도 특별한 장소이구나, 싶어서 주저없이 들어갔다. 생각해보니 페루 쿠스코의 대성당을 갔던 이후로 참 오랜만에 발을 들여놓는 성당이다. 이제 또다시 여행자의 운을 빌 때가 되기도 했지. 

 

 이 성당은 1732년에 첫 미사를 시작했고, 건축적으로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라고 한다. 

 주제단은 바로크 형식인데 페루 쿠스코에서 온 은으로 만든 은판으로 씌워져 있다. 성당에는 6개의 제단이 있는데 독일 바로크 형식이고 회색과 금장으로 되어 있으며 천사 모양은 모두 인디언 예술가들이 한 것이다.

  공연장과 같은 건물에 있는 하드록카페에서 저녁을 먹고 티켓을 교환했다. 드디어 푸에르자 브루타 공연장에 갈 시간.

 전용 공연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이 각국의 공연 포스터다. 푸에르자 브루타 팀이 세계의 얼마나 많은 도시들을 누비고 다녔는지 느낄 수 있었다. 부다페스트, 시카고, 뉴욕, 타이완, 런던, 도쿄... 

서울에서는 2013년에 공연을 했나보다. 그 땐 이런 공연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오히려 본토에 와서 훨씬 저렴한 값에 공연을 즐길 수 있게 됐다. 

 공연장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입장했다.

 푸에르자브루타에는 좌석이 없고, 더 비싼 좌석과 값싼 좌석의 구분이 없다. 넓고 평평한 바닥에 모든 관객들은 공연 내내 서 있게 된다. 마치 클럽에 온 것처럼. 다행히 나름대로 공연장의 중앙에 자리를 잡게 됐는데, 공연이 시작하면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특이하게도 공연 중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는 게 허용된다. "아무리 찍어봤자 우리의 독특한 퍼포먼스가 주는 감흥을 화면으로는 절대 전달할 수 없을 거야-"라는 당당한 자신감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다. 


 <푸에르자 브루타>는 특별한 줄거리가 없는 무언극이다. 무엇을 상징하는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 완전히 알 수는 없으나 다만 공연 제목처럼 '미친 듯한 힘'이 폭발한다. 배우들은 자신을 뒤로 끌어당기는 힘에 맞서서 앞으로 내달리고, 중력에 맞서듯 몸에 줄을 말고 수직으로 서서 벽을 달리고 하늘을 난다. 공기를 부수겠다는 듯, 공중에서 투명 바닥을 향해 몸을 내던지고 몸부림친다. 기껏 지어놓은 것을 부수고, 또 짓고 또 부수기를 반복한다. 

 폭발적인 에너지를 보여주는 눈 앞의 배우들은, 단 한 번의 공연의 보는 우리에겐 특별하고 비일상적인 것이지만 저들에게는 저것이 매일 일어나는 일상이자 돈벌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늘이 처음인 것처럼, 저 퍼포먼스가 진짜로 벌어지는 일인 것처럼 포효하는 모습이 감동을 준다.


 나는 대학생 시절 재즈댄스동아리 활동을 했다. 그 동아리가 학내에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중앙동아리였기 때문에, 학교 대강당에서 매년 정기 대공연도 하고 대학 축제나 여러 단과대 행사 등등 무대에 설 기회가 많았다. 수줍음이 많고, 발표하러 교실 앞에만 가도 목소리가 벌벌 떨리던 내가 공연예술 동아리에 들어갔다는 것은 타고난 성격을 바꿔 볼 기회이기도 했고, 또 동시에 타고난 성격을 '거스르는' 일이기도 했다.


 춤을 시작한 것, 그래서 지금까지도 6년째 춤을 추고 있는 것, 그리고 화려하게 분장하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떨어지는 핀조명을 받으며 공연을 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아쉬운 건, "무대 위에서 그 때 난 왜 더 끼를 부리지 못했을까?" 하는 부분이다. 만약 지금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뻔뻔스러운 무대 매너를 보여줄 수 있을 텐데.  춤을 잘 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춤을 추는 사람의 당당한 표정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일상적으로 짓는 표정보다도 더 과장된 표정을 지어야만, 그래야지만 무대 아래의 관중들에게 전달될까말까다. 


 그래서인지 <푸에르자 브루타> 배우들의 제대로 살아있는 표정과 열띤 몸짓이 더더욱 과거의 수줍고 순진했던 나의 '댄서' 시절에 아쉬움을 자극했다.

공연이 끝날 때쯤이면 모두들 흠뻑 젖게 된다.  

혼자 밥을 먹는 것도, 혼자 영화를 보는 것도 모두 해봤지만 혼자 공연을 보는 것은 이 날이 처음이었는데 그것이 <푸에르자브루타>여서 다행이다. 좌석의 구분 없이 모두와 몸을 부대끼면서  남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 없이 실컷 환호하고 아이처럼 신기해해도 괜찮았던 공연이었기 때문에.


너무 즐거웠던 공연을 끝내고 나니 부에노스 아이레스 밤거리에는 인적이 뜸해졌다. 다시 산뗄모의 '우리집(!)'에 돌아가서 동네 마트에서 이것 저것 주전부리 쇼핑을 하는 걸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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