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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지 Jan 31. 2018

요코 오노는 요코 오노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MALBA

MALBA에서 살아있는 자아를 만나고 레꼴레타에서 죽어버린 껍데기를 보다

지하철을 타고 팔레르모 지구로 향하는 길.

사실은 버스를 타고 가면 훨씬 빠른데, 그 사실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난 후에야 알아버렸다. 

낡고, 별다른 편의 시설도 없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하철이지만 그래도 역마다 제각기 다른 벽화가 있어 개성이 넘친다.


 도착한 말바(MALBA: Museo de Arte Latinoamericano Buenos Aires). 부에노스아이레스 라틴아메리카 미술관이다. 두 개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하나는 <20세기 라틴아메리카 미술 컬렉션>이고 또 하나는 요코 오노의 <Dreams Come True>라는 제목의 특별 전시회다. 

MALBA의 입구.

 내부에 설치된 미술작품. 아마도 아르헨티나의 과거 정치적 사건이 담긴 문서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던 것 같다.

요코 오노의 전시회가 가장 기대됐지만, 그 전에 먼저 상설 전시관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멕시코시티에 이어서 참 오랜만에 만난 프리다 칼로. 

 콜롬비아 보고타의 보테로 미술관에서 원 없이 봤던 보테로의 작품과도 재회했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뭉글뭉글 누그러진다. 


 그리고 드디어 요코 노의 전시회를 보러 갔다. 

 

 나는 요코 오노가 '예술가'라는 사실을 몰랐다. 아니 '알지만 몰랐다'. 요코 오노가 비틀즈 멤버 존 레논의 연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녀가 존 레논과 함께 침대에 누워서 전쟁에 반대하는 퍼포먼스인 'Bed Peace'를 보였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세계 사람들에게 그녀는 '어디서 굴러들어와 존 레논을 홀려서 비틀즈가 해체되게 만든 나쁜년'으로 더 잘 알려져있는 듯하다. 부끄럽게도 나 또한 요코 오노를 같은 시각으로 보고 있었다. 


 이 전시회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전형적인 여성 혐오적 시선을 나도 모르게 답습하고 있었는가에 대해 부끄러웠다. 비틀즈의 해체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 여러가지 이유를 제쳐 두고 한 여자, 그것도 '동양인 여자'를 마녀사냥하는 것이 비틀즈의 해체가 못마땅한 열혈 팬들이 자신들의 인지부조화를 달랠 가장 편리한 방법이었겠지.


 무엇보다도 그녀를 '존 레논의 연인'으로 기억하는 건 그녀에게도 무례한 일 아닐까? 사람은 모두 'XX의 딸/엄마/연인/아내'로만 기억되기엔 아까운, 유일한 존재니까. 


 행위예술가 요코 오노의 작품은 첫 시작부터 강렬했다. 

벽에 붙어 있는 수많은 여성의 눈을 찍은 사진들.

그 밑에는 요코 오노의 편지가 붙어 있다. "여성으로서 당신이 겪은 모든 폭력을 증언하세요. 당신의 모국어로 그 증언을 쓰세요. 익명이어도 좋습니다. 당신의 눈만을 찍은 사진을 보내주세요. 당신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이 사진들이 요코 오노의 부름에 대한 여자들의 답이다.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눈 사진과 함께 여자라는 이유로 겪어야 했던 모든 폭력들이 적혀 있다. 멕시코시티 프리다 칼로의 집에서 봤던 그녀의 자화상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사진 옆에는 요코 오노의 메시지가 써 있다.

"당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라

직관을 믿어라

당신을 보여주어라

한계란 없다.


용기를 가져라.

분노를 품어라.

우리는 모두 함께다.

당신의 직관을 사용하라.

불확실이란 없다.


용기를 가져라.

분노를 품어라.

우리는 다시 일어나고 있다."


 내 의역이라 틀린 번역일 수 있다. 어쨌거나 자신이 당한 폭력을 증언하고, 공통된 경험을 바탕으로 함께 연대하자는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었다. 

 어떤 의도의 작품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커다란 나무 십자가가 있었고, 매달려있는 작은 망치로 사람들이 전시관에 놓여진 쇠못을 박아 넣고 있었다. 이미 이 곳을 다녀간 많은 관람객들에 의해 빽빽하게 못이 박혀 있어서 쉽지는 않았지만, 나도 작은 틈을 찾아 내 못을 박았다. 내가 미워했던 사람, 미워했던 기억, 나를 힘들게 했던 모든 것을 이 작은 못과 함께 털어놓고 올 수 있길 빌며. 

"Cuando suene el telefono

sepan que soy yo."

"전화기가 울리거든, 나인 줄 아세요." -요코 오노.

선도 연결되어있지 않은 전화기라 절대 울리진 않겠지만 어쩐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 누구에게도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고 지내보세요

a) 3일 동안

b) 45일 동안

c) 3달 동안

당신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세요."


 그리고 다음 작품으로 옮겨갔다. 커다란 탁자에 온갖 깨진 그릇 조각이 있고, 관람객들이 조각들을 테이프와 노끈으로 이어붙이며 온전한 하나의 그릇으로 만들려 애쓰고 있었다.

"주의깊게 수선해보시오.

그리고 수선하는 동안,

이 세상을 수선한다고 생각해보시오."

 요코 오노의 메시지를 읽고 나니 가슴이 더 찡했다. 깨진 그릇처럼 이 세상도 여기저기 깨지고 병들었다는 뜻이겠지. 나도 자리에 앉아서 그릇을 이어붙이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서로 연결되는 조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미 깨져버린 그릇을 다시 온전한 모양으로 이어붙이기 어려운 만큼, 병들 대로 병든 세상도 이미 회복 불가능이라는 뜻일까 싶어서 안타까웠는데, 한켠에 전시된 관람객들의 '작품'들을 봤다. 분명히 서로 아귀가 안 맞는 조각들인데도 억지로 테이프와 노끈으로 칭칭 감아 한 몸으로 만들어버린 그릇들. 이렇게라도 해서 세상을 낫게 하고 싶다는, 평화를 향한 마음이 느껴져서 뭉클했다.

 세계 지도가 있고 그 옆에 "Imagina la paz(평화를 상상해 보라)" 라는 글씨의 스탬프가 놓여 있다. 관람객들이 도장을 세계 지도의 원하는 곳에 마음껏 찍을 수 있게 해 놓은 것이다. 나도 한국 땅 위에 스탬프를 찍고, 칠레에서 받은 내 임시여권 위에도 하나 찍어 왔다. 

"색깔을 더해 보시오."

물감이 놓여 있다. 원래는 하얗게 비어있었을 캔버스가 관람객들의 붓질로 가득 찼다.

 당연히 나도 붓을 들어 내 흔적을 남기고 왔다. 

 전시회에는 요코 오노의 행위예술을 담은 비디오 또한 상영되고 있었다.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스튜디오 바닥에 흰 옷을 입고 얌전히 앉아 있는 요코 오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한 남자에게 가위가 주어지면, 그 남자는 다가와서 요코 오노의 셔츠를 난도질하고 속옷 끈을 가위로 자른다.

 그 작품을 볼 때는 저게 무슨 의미일까, 이해하지 못했는데 한국에 들어와서 우연히 그 작품에 대한 해설을 읽게 됐다. 여성으로서 그녀가 겪었던 모든 원치 않은 시선들, 특히 동양인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멸시와 조롱을 의미한다고 했다. 진짜로 그녀가 누구인지와는 관심이 없고, 그저 그녀를 한 '대상'으로서 소비하고 고갈시키기에 바빴던 사람들. 나도 이 전시회에서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시선을 답습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다음은 "엄마"를 주제로 한 작품이었다.  

<Mi mami es hermosa>(나의 어머니는 아름답다)라는 제목의 작품.

이 사진을 페이스북에 게시했을 때에는 음란물이라는 이유로 게시물이 삭제됐었는데 여긴 괜찮을지 모르겠다.

"이것은 당신들, 아르헨티나의 모든 어머니들에 대한 헌사입니다."

벽에 설치된 거대한 칠판 위에는 관람객들이 분필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메시지를 남기고 있었다. 

 남미 여행 두 달째. 엄마를 보지 못한 지도 두 달 째. 

 한글로 된 메시지는 하나도 없길래 내가 최초의 한글 메시지를 남기고 왔다.

 사실 떠나올 때에도 잘 알지 못했고 신경쓰지 않았다. 먼 남미 땅으로 가겠다는 딸을 보는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걱정투성이일지 헤아리지 않았다. 그리고 여행 도중에도 내 한 몸 챙기기에 바빠서 한국에서 엄마가 혹여나 몸이 아프면 어쩌지, 내가 없는 시간이 외롭진 않을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나는 종종 묻는다. "엄마, 대체 어떤 마음으로 내가 남미여행 가겠다는 걸 허락한 거야?" 그러면 엄마가 대답하신다. "그러게, 허락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위험한 곳을."

"웃으면서 한 주를 보내보시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설치된 돋보기로 위의 천장을 살펴보는 설치미술이다. 잘 찾아 보면 "Si (Yes)"라는 아주 작은 글자를 찾을 수 있다. 

 "모든 행성은 자신만의 궤도가 있다.

 당신 주위의 사람들이 행성들이라고 상상해 보라.

 때로는 단순히 그들이 궤도를 돌고 빛나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도 아름답다."


"전쟁은 끝났다!"

존 레논과 요코 오노가 함께 한 1969년의 반전 시위.

"너 자신을 평화롭게 하라."

 이날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건 작품에 표시된 창작연도였다. 2016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지만, 그리고 나도 몰랐지만 요코 오노는 지금까지도 작품을 하고 있는 현역 예술가다. 존 레논과 함께 침대에 누워 세계 평화를 외치던 1696년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얼마나 자주, 다른 사람들을 잘 알지도 못한 채 우리가 원하는 대로 판단하고 있는지.


  나는 예술 작품이 얼마나 잘 완성됐는지 등등의 작품성을 따질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확실했던 것은 관객들이 나머지 절반을 완성시켜나가는 형식의 그녀의 전시에서, 그 동안 보았던 수많은 전시에선 느낄 수 없었던 즐거움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웃으면서 살자고, 부정적인 생각은 지우고 긍정을 향하자고, 미움은 다 털고 좋은 것을 그리고 쓰자고, 망가지고 깨진 것들을 성심성의껏 수선하고 이어붙이면서 살자고 권하는 일관된 메시지를 통해서, 요코 오노가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MALBA를 나와서 전날에도 보았던 Floralis Generica를 또 만났다. 

흐린 날씨가 아쉬웠지만 오후라서 그런지 전날보다 꽃잎이 조금 더 벌어진 걸 볼 수 있었다.

흐린 날씨가 못내 아쉽다.


 팔레르모 지구에서 대로변을 따라 걷고 또 걸어서 레꼴레타 지구까지 도착했다. 전날 푸에르자 브루타 공연 시간에 쫓겨서 지나치고 말았던 레콜레타 공동묘지(Cementerio de la Recoleta)에 도착했다.  

 레꼴레타 자체가 부촌이고, 레꼴레타에 묻히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원래 알고 있었지만, 더 자세한 배경 설명을 나는 여행이 끝난 후에 책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세 곳의 공동묘지 중 가장 화려하고, 값 비싸고, 또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계급이 증명되는 곳이 바로 레꼴레따이다. 이 레꼴레따 묘지는 1822년 가톨릭 국가인 아르헨티나에서 교회 내에 무덤을 쓰는 것이 금지되면서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이던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가 수도원의 과수원에 북부묘지를 설치하면서 유래되었다. 현대와 같이 담이 쌓여진 것은 1881년이고, 그 후부터 많은 호화 장묘가 입주하기 시작했다. 1880년부터 1930년 사이에 상류 지배 계층의 묘지가 되어버렸다. 여기에 있는 유택들은 모두 이탈리아가 프랑스에서 수입한 대리석 등의 최고급 자재로 건립되었다. 약 4헥타르 정도의 넓이로 이루어진 이 묘지에는 6,400개의 가족묘가 만들어졌고, 그 동안 260만 명이 묻혔다. 어느 정도 비쌀까? 1 제곱미터 당 2,500만원 정도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고부안

 레꼴레타 공동묘지의 규모는 굉장히 커서 길을 잃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심지어 입구에 관광객들을 위한 지도까지 있다. 각각의 묘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고 누구의 묘인지도 표시되어 있다.

 레콜레타 묘지에 있는 대부분의 무덤은 국가지정 역사 기념물이 되어 있다. 왜냐하면 아르헨티나의 독립영웅과 위대한 대통령들의 무덤, 즉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증언할 사람들의 무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단지 잔디가 덮인 동그란 봉분이 전부인 우리나라의 공동묘지와는 다르게 레콜레타의 묘지들에는 저마다 고급 대리석으로 온갖 조각상과 장식물들이 서로 경쟁하고 과시하듯 세워져 있다. 

 어느 블로그의 후기에서는 레콜레타에서 매우 고약한 냄새가 나서 도저히 오래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다는데 그게 혹시 시체가 부패하는 냄새인 걸까? 다행히 나는 여름이 아닌 겨울에 이 곳을 찾아서 별다른 냄새는 맡지 못했다. 


 레콜레타 묘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매우 높은 벽이었다. 회색의, 높다랗고 두꺼운 벽. 이 초호화 묘지 옆에는 최고급 주택들이 지어져있다. 최고급 아파트에서 창을 통해 최고급 죽음을 내려다보는 셈이다. 

 레꼴레타의 묘지들은 각자 하나의 집을 닮았다. 아니, 집이라는 말도 모자라 제각각 하나의 작은 신전 혹은 궁궐을 닮았다. 그가 죽을 때 저승까지는 함께 데려가지 못한 막대한 부와 명예가, 육체가 썩어 없어져서 땅에 들어가버린 주인의 허물로 남아 서 있는 것이다.

 

 차라리 삶은 유한하기라도 하지, 죽음의 시간은 무한하지 않은가. 천 년이고 수억 년이고 지속되는 사후의 시간 동안 레꼴레타에 딴 한 평을 영원히 소유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레꼴레타에 묻히는 비용이 그토록 값비싼 것이겠지.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한 평의 땅, 허물지도 못하고 새로운 것을 짓지도 못하는 효용가치 제로의 땅. 다 죽어서 어디에 쓰려고 그럴까. 

 어디 있을까, 한참을 찾다가 드디어 발견했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몰려있고, 다른 무덤들보다도 싱싱한 꽃들이 가득 바쳐져 있는 무덤. 바로 에바 페론(에비타)의 무덤이다. 

Familia Duarte, 즉 두아르테 가문이라는 뜻이다. 에바 페론의 결혼 전 성은 두아르테로, 즉 이 곳은 두아르테 가문의 가족묘이다. 

 에바 페론을 기리는 여러 개의 동판이 붙여져 있다. 


 에바 페론이 이 곳에 묻히기까지도 사실은 여러 곡절이 있었다고 한다. 에비타는 자궁 종양이 폐까지 전이되어 1952년 7월 26일 사망했는데, 1955년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페론이 실각하는 어수선한 상황에서 에비타의 시체가 사라졌다. 1972년이 되어서야 그녀의 시체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국외에 반출되어 이탈리아에 묻혀있던 것이 밝혀졌다. 발견된 시신은 당시 스페인에서 망명 중이던 남편 후안 페론에게 반환되었다. 

 그리하여 1974년 에비타의 시신은 레꼴레따 묘지로 이장되었는데, 그녀의 시신은 또 한번 유괴되는 수난을 겪게 된다. 찾은 시신은 공동묘지로 가지 못하고, 1976년까지는 올리보스에 있는 대통령 관저에 보관되었다가 비로소 레꼴레타에 있는 두아르테 가문의 가족묘에 안치된다.

 레꼴레타 공동묘지에서는 아르헨티나 역사가 묻힌 곳답게, 대통령의 묘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을씨년스러운 날씨, 차가운 돌들로 만들어진 거대한 무덤들 사이의 미로 같은 길들을 헤메다보니 자연스레 나의 죽음에 대해서 상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있을 때에는 힘이 닿는 곳까지, 내 팔자가 허락하는 곳까지 내가 가진 모든 능력을 발휘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죽음 이후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레꼴레타 공동묘지를 보면서 이름만 남기고, 이승의 껍데기들은 더 살 날이 많은 젊은 사람들한테 남기고 소멸할 수 있길 기원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죽었는데 다 무슨 소용이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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