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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지 Feb 04. 2018

'탱고' 아닌 '땅고'에 취한 밤
@부에노스아이레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엘 아테네오, 카페 토르토니 탱고쇼

 레꼴레타 공동묘지에서 나와 또 부지런히 걷고 또 걸었다. 저녁에 있을 탱고쇼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했다. 

 행선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라고 꼽히는 '엘 아테네오 그랜드 스플렌디드(El Ateneo Grand Splendid)'. 아마도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구글맵을 보며 수 블록의 꽤 먼 거리를 그저 걷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는 걷는 걸 좋아하니까.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아르헨티나의 가장 대중적인 아이스크림 체인인 프레도(freddo)에 들어가서 아이스크림 콘을 하나 사서 먹으며 걸었다.

 어떻게 아르헨티나의 아이스크림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르헨티나에는 사람보다 소가 더 머릿수가 많다고들 한다. 그만큼 신선하게 공급되는 우유와 남미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이국적인 맛의 과육으로 만든 아이스크림은 정말 정말 맛있다. 꾸덕하고 부드러운 식감에 과육이 생생하게 씹힌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한 번도 배스킨라빈스를 본 적이 없었는데, 그럴만 했다. 어디서나 훨씬 더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는데 누가 배스킨라빈스를 먹으려고 하겠어.

 내가 고른 맛은 마스카포네 치즈와 산딸기였는데, 이후에도 아르헨티나에서 몇 번 더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지만 이게 최강의 조합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겨울은 서울의 겨울과 달리 눈도 오지 않고 칼바람도 불지 않아서,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그저 달콤하게만 느껴졌다.


 한참을 아르헨티나의 도심 풍경을 구경하며 걷다가 도착한 엘 아테네오 서점. 사실 '엘 아테네오'라는 서점 자체는 마치 한국의 교보문고, 반디앤루니스처럼 서점 체인의 이름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라고 이름이 붙은 바로 그 서점을 가려면, 구글맵에 'El Ateneo Grand Splendid'라고 검색해야 한다. 단어 그대로, 웅장하고 멋진 곳이므로.

 서점의 규모는 정말 놀라서 입이 떡 벌어질 수준이었다.

 이 곳은 원래는 오페라 극장이었는데, 재정 악화로 극장을 경영할 수 없게 되자 서점으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객석이 있던 자리에 이제는 책이 빽빽하고, 무대 위는 카페로 변신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의 일상에는 예술이 진하게 녹아들어있다. 이 곳에서 머무른 매우 짧은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에도, 길거리에서 시시때때로 울려퍼지는 탱고 선율의 버스킹과 크고 작은 공연장들을 통해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부러웠던 것은 서울보다 확연히 서점이 많았다는 것이다. 특히, 대형서점이 아닌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책방이 많다는 것이, 그리고 그 작은 서점들 안에는 예외없이 꼭 손님이 있었다는 것이 부러웠다. 


 내가 사는 동네에도 예전에는 중학교 옆에 자그마한 동네 서점이 있었다. 순하고 수줍은 인상의 서점 아저씨가, 내가 찾는 책 이름을 말하면 서가에서 곧바로 책을 척척 찾아서 꺼내주시곤 했다. 어떻게 그 조그만 가게 안에서 내가 찾는 책들이 전부 다 꽉꽉 들어차 있는 건지, 눈치 없고 철도 없는 세상 해맑은 초딩이었던 나는 그 작은 서점을 구석구석 살피며 여기저기 내 손때를 묻혀놓았었다. 그 서점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지만.


 동네 서점이 없어진 이유에 대해 인터넷 도서 구매의 증가와 대한민국의 저조한 독서율을 들고는 한다. 한국 사람들, 특히 성인들이 놀랍도록 책을 안 읽는다는 자조적인 시선도 많다. 그러나 가끔 강남역과 광화문의 교보문고에 내려가보면 그 말도 반드시 사실은 아닌 듯하다. 그 거대한 지하 세계에서 나는 분명히, 수많은 책들을 마주하면서 신이 나고 설레하는 사람들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대형서점이 동네 서점을 잠식했다'는 비판은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교보문고라는 공간 자체가 주는 매력이 있지 않은가? 서울 중심부의 지하철 역이 연결된 지하에 펼쳐지는 거대한 공간 속에 세상의 모든 책이 들어차 있는 듯한 시각적인 스펙타클이, 사람들을 서점으로 끌어들이는 중요한 매력의 요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지 않는다"면서 수많은 이름 모를 대중들을 질책하고 서점의 미래가 없다고 암담해하기보다는, '찾아가고 싶은 서점'을 만드는 것, '특색있고 아름다운 공간으로서의 서점'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핸다. 공간이 아름다우면 찾고 싶고, 머물고 싶은 게 당연하니까. 특히나 '과거에 오페라 극장이었다'는 엘 아테네오 서점이나 '휴 그랜트와 줄리아 로버츠가 만난 바로 그 곳'인 노팅힐의 서점처럼 이야기를 가진 공간이면 더더욱.

 오페라 무대를 개조해서 만든 서점 속의 카페. 나도 여기 앉아서 차 한잔 마시고 싶었지만 만석이라서 그럴 수 없었다. 하긴, 나 같아도 그랬겠다. 나 같아도 이 멋진 카페에 한 번 자리를 찜하고 나면 이기적일지라도 오래오래 앉아서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겠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책 코너. 이것 저것 집어서 읽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다. 여행 중에 서점에 들러서 여행책 코너를 둘러보는 건 처음인데, 막상 여행 중이다 보니 선뜻 어느 책에도 손이 가지를 않더라. 이미 여행의 단맛과 쓴맛을 골고루 맛보고 있는 중이라서 당장은 여행에 대한 환상이 없었달까.


 한국에 돌아오고 나니 또 여행에 대한 욕망은 아무리 물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밑빠진 독과 같다. 미국 뉴욕, 스페인, 뉴질랜드, 호주, 미얀마, 캐나다 옐로나이프, 멕시코 과나후아또, 나미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이스라엘, 모로코, 포르투갈, 런던... 지금은 가고 싶은 여행지를 밤새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서점이 내려다보이는 난간은 이 곳을 찾은 많은 관광객들의 포토존이다. 귀걸이는 이전날 레꼴레타 묘지 근처에서 열리는 수공예품 시장에서 산, 예쁜 분홍색 돌이 앙증맞은 수제 귀걸이. 

 봐도 봐도 계속 뒤돌아보게 되고, 책을 술술 읽을 만큼 스페인어를 잘 하기만 했더라면 앉아서 한참 책을 읽고 싶었던 서점을 뒤로 하고 부지런히 또 걸음을 옮겼다. 아침에 예약해두었던 카페 토르토니에서의 탱고쇼에 늦지 않으려고.


 이 전에 보았던 피아졸라 탱고쇼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작고 단촐한 무대. 카페 직원이 내가 예약해둔 자리로 나를 안내하고 메뉴판을 가져다 주었다. 탱고쇼를 감상하는 동안 음료나 간단한 음식을 따로 주문해서 먹을 수 있다.


 쇼가 시작됐다.

 나이 지긋하신 아주머니 가수가 나오셔서 인삿말을 하신다. 

 "다들 어디서 오셨습니까? 아르헨티나? 브라질? 일본? 그렇군요... 우리는 각자 다른 지역에서 왔고 나이도 다르지만, 오늘 밤은 단 한 가지에 대한 열정으로 여기 모였습니다-땅고(Tango.)"


 관중들의 박수와 함께 남녀 댄서가 무대로 등장했다. 

 악사들의 연주에 맞춰 댄서가 진지하게 몸을 움직인다.

 전날 보았던 피아졸라 탱고쇼의 댄서들이 훨씬 화려한 의상, 외모 그리고 춤동작을 선보였다면 이 탱고쇼는 훨씬 원숙미가 느껴지고 절제된 느낌이다. 

 댄서가 퇴장하고 나면 가수가 등장해 노래를 부른다.

 흔히 '땅고(또는 탱고)'하면 섹시하고 화려한 춤만을 떠올리지만, 땅고는 본래 연주로서의 땅고와 노래로서의 땅고 그리고 춤으로서의 땅고가 어우러진, 즉 음악과 춤이 혼합된 장르이다. 구슬프고 애절한 춤이자 노래이고 연주인 것이다. 마치 미국의 블루스와 스페인의 플라멩코처럼.


 탱고에 대한 영화를 보고 싶어서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 카페>라는 영화를 찾아서 본 적이 있다. 전설적인 탱고 마에스트로들이 모여 연주를 하는 내용의 영화인데, 거기서 한 나이 지긋한 여가수가 <Mi Buenos Aires querido>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목소리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가면 꼭 저 노래를 라이브로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의 사랑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내가 너를 다시 만날 땐 고통도 망각도 없을 것이다.

내가 태어난 거리의 가로등은 

내 사랑의 약속들을 지키는 파수꾼이었다.

그 조용한 불빛 아래 태양처럼 빛나던,

나의 귀여운 아기, 너를 내가 처음 보았지.

오늘, 나의 운은

내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항구도시,

너를 다시 보고,

반도네온의 푸념 같은 음악을 듣고,

가슴 가운데 심장이 팔딱거릴 운이었던 모양이다.


 토르토니 카페의 탱고 가수는 내가 듣고 싶던 딱 그 목소리를 갖고 계신 분이었다. 풍부한 저음과 삶의 애환이 담긴 음색. 

 땅고는 아르헨티나에서 전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문화장르이다. 땅고만 전문으로 하는 음악 방송이 있는가 하면 케이블 TV에도 땅고 전문 채널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땅고는 1860년경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몬떼비데오 두 군데서 생겨났다. 수백만 명의 이민자들이 향수를 달래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항구 사창가와 술집에서 춤으로 먼저 태어났다. 그리고 음악이 생겨났다. 1916년까지 땅고는 다른 곳이 아닌 사창가에서, 순번을 기다리던 남자들끼리 추던 춤이었다.


  땅고에 담긴 아픔과 슬픔은 '부에노스아이레스 드림'을 찾아온, 돈을 벌겠다고 홀로 이민을 온 사람들의 절망감과 외로움에 깊은 연관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창녀에게로부터 모든 감정을 다 해소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다 채울 수 없는 사랑, 총체적인 사랑에 대한 향수가 땅고에 담기게 된 것이다. 

 땅고 연주에 빠질 수 없는 요소가 이 사진 속의 작은 아코디언 '반도네온'이다. 반도네온은 원래 값이 비싼 오르간을 대신할 값싼 대용품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이것이 외항선을 통해 아르헨티나로 유입되고 땅고 연주에 사용됐다고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여행 중 탱고쇼를 보고, 또 길거리의 버스커들을 보면서 반도네온의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애절하면서도 관능적인 소리를 너무나 좋아하게 됐다. 피아노를 칠 줄 아는 것 외에도 우쿨렐레, 오카리나를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반도네온 연주 배우기'도 인생 버킷리스트에 추가해야 할 듯싶다.

 몇몇 헐리우드 영화 때문에 탱고는 입에 문 장미꽃을 서로의 입에서 입으로 넘기고 눈을 부릅뜬 채 고개를 휙휙 돌리고 과장되게 허리를 꺾고 행진하듯 스텝을 옮기는 춤인 것처럼 와전되었지만 본토에서 만난 땅고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관능적이면서도 고독함이 느껴지는, 두 댄서가 서로의 깊은 외로움을 달래는 듯한 춤이었다.


 지난 날 보았던 피아졸라 탱고쇼에 여러 쌍의 남녀 댄서들이 등장한다면, 카페 토르토니의 탱고 쇼에서는 오직 한 쌍의 남녀 댄서만이 의상을 바꿔가며 등장한다. 댄스 무대 사이사이에 노래가 있고, 악기 연주가 있다.


 2시간 여의 근사한 공연이 끝나고, 모든 연주자와 가수와 댄서들의 인사.


 댄서 오빠가 날 향해 웃은 것 같은 건 나 혼자만의 착각이겠지..?

 공연은 다 끝났지만 괜히 일어나서 가기가 싫어 자리에서 밍기적댔다.

밤이 깊으니 화장도 다 무너져서 거의 민낯이나 다름 없는 상태가 돼버렸다.

 아침이나, 밤이나. 밤낮 없이 북적이는 카페 토르토니.

 피곤한 몸과 감동을 잔뜩 받은 들뜬 마음을 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조용한 밤거리를 지나 산 뗄모의 우리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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