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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지 Mar 09. 2018

일요일에 만나요, 산텔모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일요일이면 산텔모 시장에 가야 한다

내가 머물고 있는 후안의 집은 산뗄모 지구에 있다. 아기자기하게 볼 것이 많은 운치 있는 동네다.

산텔모(혹은 산뗄모)에는 실내 상설 시장이 있기도 하지만, 일요일이 되면 길거리에 장이 열린다. 실내에 있는 마켓이 과일, 채소, 육류 등을 파는 전형적인 '시장'이라면, 일요일에 열리는 마켓은 수공예품이나 예술품이 위주가 된다. 


 날이 흐리더니 빗방울이 조금씩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갖고 있던 가이드북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표적인 아이스크림 맛집이 나와 있었는데, 그 중 한 곳이 마침 산뗄모에 있었다. Nonna Bianca라는 아이스크림가게인데, 아마 내가 이 날 이곳의 첫 손님이었겠지? 비 오는 쌀쌀한 날씨에 아이스크림을 먹는 건 한국에서는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인데, 여기는 1일 1아이스크림을 먹어야 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니까.

간만에 머리 묶었다 ^_^


실내 산텔모 시장에 들어가 보았다. 제법 규모가 크다!

한국에서도 전통 시장에 가는 걸 좋아한다. 엄마 따라서 갔다가 찹쌀도너츠처럼 정겨운 간식 얻어 먹는 재미도 있고, 순대국은 왠지 시장 골목에 있는 집이 맛있으니까.

 재미있게도 산텔모 시장 안에도 이 사진처럼 식당이 있다. 일요일 아침, 커피와 함께 간단한 식사를 즐기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이 많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니 시장다운 흥이 안 났다. 아쉬워라ㅠㅠ

 산텔모 시장 구경의 재미는 물건을 보는 것뿐만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거리공연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마리오네트 인형으로 인형극을 선보이는 아저씨. 술에 만취한 아저씨가 콘셉트인 걸까? 인형이 너무 애처로워보인다.


 비가 오는데 우산이 없어서 길거리의 우산 장수 아저씨로부터 우산을 샀다. 그런데 어쩐지 싸다 싶었더니, 겉으로는 멀쩡해보이는 우산이 한 10분도 안 돼서 고장이 났다. 아저씨 밉다!


 비는 점점 거세지고, 이런 날씨로는 돌아다니기도 힘들겠다 싶었다. 관광은 다 틀렸고, 어딜 가서 뭘 하면서 하루를 보낼까? 고민하다가 일단은 비를 뚫고 걸어서 산텔모를 벗어나 중심가로 갔다.

 저번에 갔던 카페 토르토니(Cafe Tortoni), 라 히랄다(La Giralda) 등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오래된 카페의 매력에 반해서 '하루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카페에서 하루 종일 앉아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오늘이 딱 그 날인 것 같아서. 


 부에노스아이레스 Avenida de Mayo에 있는 카페 Confiteria London City로 갔다. 대로변에 위치해있고 첫날부터 딱 눈에 띄는 곳이어서 '저긴 꼭 가 봐야지'하고 찜해두었던 카페인데, 찾아보니 역시나 이 곳도 유명한 카페였다. 

 1954년에 문을 열었고, 아르헨티나의 많은 문학가와 정치인들이 즐겨찾던 카페라고 한다. 이 곳에 매일 앉아서 완성시킨 유명한 문학 작품도 있다고 한다. 

주문한 밀크티와 케이크.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음료를 주문하면 이렇게 탄산수 한 잔도 같이 내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런 세심한 배려가 기분 좋다.

 밀크티 한 잔을 주문해도 마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밀크티를 대접하듯 여러 개의 잔과 접시가 딸려 나온다. 주전자, 따뜻한 우유, 거름망과 찻잔 등. 한국의 카페에서도 종종 주전자째 차를 주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운데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마시는 것이 좀 더 황송한 느낌이 있다. 

 사실 한국의 웬만한 카페에서 주문하는 조각 케이크는 다 비슷비슷하기에, 별 기대없이 주문한 라즈베리 치즈케이크. 그런데 왕관처럼 예쁜 설탕장식을 얹고 그 위로 라즈베리 퓨레를 듬뿍 끼얹었다. 

 진열장에서 한 조각을 무신경하게 꺼내어 접시에 올려주면 그만인 스타벅스의 조각케이크에 익숙해져 있다가, 마치 나만을 위해 꽃단장한 듯한 케이크를 보니까 기분이 좋다. 

 카페 이름에 붙은 Confiteria라는 이름답게, 역시 이 카페는 각종 케이크와 디저트류로 유명한 곳이었다. 

 물론, 여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카페들이 다들 그렇듯이, 카페 탐방의 즐거움은 단순히 맛있는 음료나 디저트에서만 오는 건 아니다. 메뉴만큼이나 '나는 당신을 특별하게 생각해요', 하고 말하듯 각자가 맡은 구역의 손님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멋진 차림의 웨이터와 웨이트리스들이 있기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카페가 특별한 거다. 

 이 웨이터 언니 오빠들이 너무나 든든하게 느껴져서, 테이블에 앉아 한참 밀린 일기를 쓰다가 화장실이 가고 싶어지자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두고 다녀왔다. 여행지에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위험 행동이긴 하지만 이 곳에서는 그래도 될 것 같아서 말이지.

 자리에 돌아왔더니 친절한 웨이터 언니가 '내가 계속 네 핸드폰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앞으로 다른 곳에서 이렇게 하면 위험해!'라고 말해주신다. 

 참, 추가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카페들은 화장실도 뭔가 너무 깨끗하고 심지어 호화로운 느낌까지 들어서 좋다. 공간 자체는 참 역사 깊고 앤틱 가구들과 노오란 조명이 번쩍거리는 화려한데, 그 호화로운 느낌과는 대조적으로 카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의 일상의 매우 자연스러운 일부이다. 혹시 이게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의 어딘지 모르게 우아하고 도도한 품위의 비밀은 아닐까?


 저녁까지도 제법 쏟아져내리는 비를 뚫고 드럭스토어에 들러서 그새 다 떨어진 샴푸와 린스를 사서 산텔모의 집으로 돌아갔다. 원래도 길고 숱이 많은 머리가 여행 내내 점점 더 길어지고 숱이 풍성해지면서 샴푸 한 통이 금방 닳는다. 



 저녁까지 제법 쏟아져내리는 폭우를 뚫고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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