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마지막 날.
드디어 떠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분이 이상해서, 산텔모 우리 집의 맞은편 작은 동네 빵집을 한 번 더 다녀왔다. 이 집 빵이 딱히 맛있지는 않지만, 푸근한 주인 아저씨의 얼굴을 한 번 더 보려고.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 다음 목적지는 푸에르토 이과수(Puerto Iguazu)다. 바로 그 이과수 폭포를 볼 수 있는, 브라질과 국경이 인접한 곳.
버스 티켓은 전날 미리 레띠로(Retiro) 버스터미널에 들러서 사놓았다.
너무 인상적이어서 사진을 찍어 놓은 레띠로 버스 터미널의 티켓 창구 번호 안내도.
아르헨티나는 땅덩어리가 큰 만큼, 전국 각지로 떠나는 장거리 버스 역시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레띠로 버스터미널 역시 웬만한 공항을 뺨칠 만큼 컸다. 사진을 보면 거의 250개 정도의 버스티켓 창구가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꼭 가보고 싶던 곳, 꼭 해 보고 싶던 것들은 다 해 봤는데,
그래도 마지막 날이 되니까 뭔가 아쉬웠다.
내가 놓친 것은 없을까.
꼭 봐야 하는 건데, 미처 알지 못하고 지나쳐버린 곳은 없을까.
물론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와서 밀롱가에 가 보지 못한 것이나, 까를로스 가르델 박물관에 가 보지 못한 것들은 당연히 아쉬웠지만.
그냥,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심가를 걷기로 했다. 가장 북적거리고, 바쁜 도시 사람들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
라바예 거리(Lavalle)나 꼬리엔떼스 대로(Avenida Corrientes)를 걷다 보면 브로드웨이에 있다는 느낌이 든다. 비록 뉴욕에는 한 번도 가 보지 못했지만. 길거리에 극장이 가득한 거리를 보면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의 삶 속에선 문화생활이 얼마나 일상적인 것인지를 느낄 수 있다.
거리를 걷다 보면 꽤 자주 만날 수 있는 아담한 동네 서점. 한국에서는 동네 서점이 거의 사라지는 추세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동네 서점이든, 대형 서점이든, 언제든 들여다보면 늘 책을 살펴보고 있는 손님들을 볼 수 있다.
진열장 속 마팔다(Mafalda)와, 프리다 칼로의 얼굴과, 안네 프랑크의 다이어리가 눈에 띈다.
맨 첫날에 보러 간 곳이자, 매일매일 마주하게 됐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상징, 7월 9일 대로(Avenida 9 de Julio). 그리고 오벨리스꼬.
건물마다 커다란 광고 전광판이 붙어서 번쩍거려서 첫 날 내 마음을 들뜨게 했던 곳이다.
걷다 보니 떼아뜨로 콜론(Theatro Colon)이 나왔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호화 오페라 극장. 꼭 들어가서 견학을 하고 싶었지만, 투어 시간이 맞지 않아서 아쉽게도 나와야 했다.
Galerias Pacifico(갈레리아스 파시피꼬) 백화점을 구경하기로 했다. 아바스토(Abasto) 백화점과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대표하는 고풍스러운 외관의 백화점이다.
원래 이 건물은 백화점이 아니라 철도 사무실(혹은 철도역)이었나보다. 1890년의 경제 위기 이후 1908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철도부문이 Pacifico 회사에 팔렸고, 1945년에 리모델링되면서 철도 사무실과 상점들을 구분하고 중앙 돔에 벽화를 그려넣었다고 한다. 1989년에는 국립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기까지 한 곳이다.
들어가면 펼쳐지는 웅장한 외관. 천장에 멋진 벽화가 그려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백화점이 지어지기 이전부터 벽화가 있는 줄 알았는데, 호화로운 상점을 건설하기로 결정된 후에 벽화를 그렸구나.
엄청나게 럭셔리한 곳을 기대했는데, 건물이 고풍스럽고 화려한 것을 제외하고 생각보다 아주 고급진 백화점은 아니었다.
그래봤자 여전히 내가 살 수 있는 물건은 없었지만.
딱 하나,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빼고는.
백화점 내의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아갔다.
남미의 아이스크림 가게가 좋은 이유는, 사기 전에 마음껏 이맛 저맛 맛을 본 후 고를 수가 있다는 것. "맛볼 수 있나요?" 하고 물어보면 점원이 친절하게 작은 스푼으로 떠다가 맛을 보여준다. 물론, 한국에서도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어차피 한국에서는 죄다 내가 아는 그 맛뿐이니까.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다르다. 한국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이국적인 과일 맛이 가득하고 둘세 데 레체(Dulce de leche)맛만 해도 종류가 대여섯가지에 달하는 데다, 과육이 입안에서 오독오독 씹히니까.
점원의 호의적인 미소를 듬뿍 받으며 고른 두 가지 맛. 무슨 맛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이과수로 가는 버스 시간은 저녁이었기 때문에, 조금 더 시내 구경을 하고 돌아올 수도 있었지만 나는 5시까지 산텔모의 우리 집, 아니 후안네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7일 동안이나 나를 자신의 자그마한 방에 받아주고 기꺼이 자신의 침대를 내주었던, 싱글대디 후안. 후안은 밤이 되면 바에서 바텐더로 일하기 때문에 오후 5시에 출근해서 밤까지 일한다. 후안이 출근하기 전, 그 동안 고마웠다는 작별의 인사를 했다.
이렇게 고마운 사람이 또 있을까? 처음 보는 사람, 외국인, 게다가 여자. 전혀 믿지 못할 낯선 사람에게 무려 7일 동안이나 자신의 공간을 온전히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지금도 종종 그의 귀여운 딸과 즐거운 주말을 보내고 있는 그의 사진이 페이스북에 올라온다. 후안도 어서 좋은 짝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기를!
집에서 화장을 지우고, 짐을 싸 챙겨들고 나니 시간이 아슬아슬하다. 서둘러 택시를 잡아타고 레띠로 터미널로 향했다. 플랫폼에 서서 이 버스인가, 저 버스인가 초조하게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푸에르토 이과수 행 버스가 들어온다. 일주일 만의 장거리 버스 여행. 눈을 뜨고 나면 지구에서 가장 큰 폭포가 있는 마을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