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사이에 로맨스 소설을 겹쳐 놓고 수업시간에 읽을 만큼 사랑이란 말랑말랑한 감정에 꽂혀 있던 때였다. 고전문학부터 로맨스 소설까지 책을 달고 살던 그 시절, 학교 방송반이었던 나는 영등포 도서관에서 하는 '문학의 밤'(그때는 문학의 밤 같은 행사가 정말 많았다.) 행사에 가게 됐다. 시와 소설을 낭독하고 발표하는 자리였는데 큰 키에 안경을 쓰고 훤한 외모의 한 오빠가 무대에 등장했다. 도서관 문학 동아리 회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동아리 소개를 했다. 그 자리에서 내가 어떤 표정으로 앉았을지는 순전히 나만 아는 비밀이다. 혹 반쯤 눈이 풀리고 넋이 나갔을 수도 있다. 문학의 밤 행사가 끝나자마나 열일곱 여자애는 한달음에 문학 동아리방을 찾았고 동아리 회원이 되었다. 내 첫 금사빠의 시작이었다.
두 번째 금사빠는 드라마의 바람을 타고 왔다.
바람머리에 한껏 멋을 낸 목도리를 하고 소프트 아이스크림 같은 목소리로 배용준이 등장했다.
그렇다. 나는 드라마 겨울연가에 푹 빠져버린 거다.
드라마는 한 해에 한 편 볼까 말까일 정도로 울고 배신하고 하는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겨울연가의 거센 바람은 나도 피해 가지 못했다. 내가 누구인가.
가만히 앉아서 드라마만 보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곧바로 팬클럽에 가입했다. 인터넷을 뒤져 공식 팬클럽 다음으로 회원수가 많은 그 팬클럽에 가입을 했다. 나처럼, 나 만큼이나 아니 나보다 더 배용준에게 빠진 수많은 팬클럽 회원들과 진한 연대감은 육아로 지친 내 눈을 반짝거리게 만들었다. 그때 나는 내 공부방 벽에 겨울연가 포스터와 배용준 사진을 알뜰살뜰 붙여 놓았다.
시간이 흘렀다. 사는 게 정신없고 바빴다. 사랑이란 감정이 푸석푸석해지려는 순간, 나는 다시 금사빠가 됐다. 연극, 뮤지컬을 정신없이 보고 다니던 2011년 뮤지컬 '김종욱 찾기'를 보고 너무 좋아서 OST를 사게 됐다. 그 OST 속 곡에서 엄기준의 노래를 듣고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물론 내 사랑은 늘 직진이다. 역시 팬클럽을 찾았다. 공식 팬클럽 다음으로 회원수가 많은 팬틀럽으로 말이다.
이번 사랑은 더 적극적이었다. 엄기준이 나오는 뮤지컬과 공연은 항상 내 공연 목록을 차지했다.
공연 후기를 올리고 팬클럽 회원들과 단체관람을 시작했다.
팬클럽에는 공연마다 선 티켓이 주어지는데 팬클럽에 티켓 예매 공지가 뜨면 선착순으로 신청을 할 수 있다. 이 예매는 실로 전쟁과 같다. 클릭 한 번이면 모든 표가 매진되는 터라 손에 신내림 정도는 있어야 순번 안에 들어갈 수 있다.
사랑의 힘은 놀랍다. 지금도 절반 독수리 타법으로 글을 쓰는 내가 이 예매에 대부분 성공을 했으니까.
나는 사랑 앞에서는 직진이라고 했다. 그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인형 만들기 자격증을 땄던 나는 공연 속 엄기준을 인형으로 만들었다.
이 인형으로 엄기준 생일파티에 참석을 했고 그와 인증사진을 찍고 인형을 전달했다.
나는 비로소 성덕이 됐다.
큰 아이는 크게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는 나의 데면데면한 성격 일부를 닮았다면, 둘째 아이는 내 금사빠와 직진 성향을 닮았다. 그 아이는 BTS 아미였다. 앨범을 모으고 굿즈를 사고 공연장도 갔다. 한걸음 더 나아가 팬픽을 써서 책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실로 내 자식임을 확인하는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