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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정 Feb 15. 2022

공부 이력서

재밌으면 그게 공부지


마흔여섯 번째 이야기






나는 공부를 좋아한다.

그렇다고 석사, 박사가 된 것은 아니지만 나는 감히 공부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학창 시절 나는 공부를 꽤 했다.



초등학교 6년 가까이를 한 집에서 세 들어 살았는데 

불행하게도 주인집 아들과 나는 동갑내기였다

그 아이와 방화동에 유일한 학교였던 송정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다.

더 불행한 것은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였다) 2학년부터 줄곧 같은 반이 되었다는 거다.



그때는 반 배정이 매우 단순한 구조였다.

남학생과 여학생을 같은 등수끼리 순서대로 반을 배정했다.

공식 비공식 1등이었던 우리는 그렇게 같은 반으로 졸업을 했다.

엄마들끼리도 같은 집에 사니 친구가 됐다.

하지만 자식 문제만큼은 친구일 수 없으셨다.



학교에서 시험만 보고 나면

두 집이 돌아가며 혼나고 울고 하는 소리가 얇은 벽 사이를 뚫고 

주거니 받거니를 했다.

하루는 그 아이가 한 문제를 틀려서 엄마에게 혼이 나면

그다음 날은 내가 한 문제를 틀려서 혼이 났다.

시험을 보고 두 집이 평화로운 날은 두 아이 모두 백점을 받은 날이다.



엄마는 유독 자식 공부에 열성이셨다. 

가끔은 공부에 열성이라기보다 세 들어 산다고 자식 기죽는 게 싫으셨던 것 같기도 하다. 

엄마는 공부뿐만 아니라 모든 숙제, 특히 방학 숙제에 공을 들이셨다. 

한 장의 그림을 수십 번 반복해서 그렸다. 일기도 다시 쓰기를 반복했고 고쳐쓰기도 수없이 했다.  

엄마의 그 수고로움은 뜻하지 않은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언니는 그림을 배운 적도 없는데 정말 그림을 잘 그렸다. 

고등학교 가서는 8절지 스케치북에 온갖 스케치를 다 해놓았는데 

어린 시절 내 눈에는 여는 화가의 작품집 같다고 느꼈다. 

그런 언니의 뛰어난 미술 실력이 넉넉하지 못한 형편 탓에 초야에 묻히고 말았지만. 

나는 엄마의 반복된 글쓰기 훈련 덕분에 온갖 글짓기상을 휩쓸었다. 

엄마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그게 다였다. 

그림보다 돈이 안 들어가는 글쓰기였지만 성공할 만큼의 재능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나는 공부를 좋아했다. 

한 학년에 스물두 반에서 스물네 반까지 있었던 학교에서 

전교 1, 2등을 했으니까 내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엄마는 변두리 방화동에서 화곡동으로 이사를 결심하셨다. 

그렇게 들어간 중학교에서 첫 시험을 치르고 8등을 했다. 

성적표를 받은 그날 나는 정말 많이, 아주 많이 엄마에게 혼이 났다. 

나 역시 8등을 해본 적이 없어서 엄마에게 혼난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8등이 이상할 것이 없었다. 

중학교를 간다고 영어를 공부해 본 적도, 수학을 미리 공부한다는 것을 알리 없는 엄마는 

당연히 중학교에 올라가도 내가 공부를 잘할 거라 생각하셨다. 

하지만 매 수업 시간은 내게 낯선 여행처럼 느껴졌다. 

8등도 잘한 것이지만 그땐 충격도 컸고 자신감도 곤두박이칠 쳤던 사건이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어디 대학원에 들어가서 석사도 받고 박사도 받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큰돈과 시간이 드는 과정이라 도전해 볼 엄두도 안 나서 

방송통신대에 재입학을 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공부 이력은 국어, 영어, 수학이 아니다. 

점수로 환산되는 공부를 마치고 대학 졸업장을 받은 이후로도 한참의 시간이 흘러 

진짜 공부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 시작됐다. 내 공부 이력서는 그때부터가 진짜였다. 



좋아서 하는 것, 너무 재미있어서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 

다음날 얼른 일어나서 그것이 하고 싶어 빨리 잠자리에 들게 하는 것, 

작은 흥분과 설렘으로 엉덩이를 들썩이게 하는 것, 

학위나 자격증 강박에서 벗어나니 공부가 보였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렇게 공부를 해야 할 운명은 아닐까?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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