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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정 May 05. 2022

연극 이야기, 망각이란 새로운 기억

피지컬 시어터 <네이처 오브 포겟팅>




연극 이야기, 망각이란 새로운 기억     



 

오늘은 한 사람의 인생이 망각되는 과정을 몸의 언어로 그려낸 아름다운 연극 이야기입니다.

바로 피지컬 시어터 <네이처 오브 포겟팅>이라는 작품인데요.

피지컬 시어터는 우리말로 하면 육체극이라고 할 수 있죠.     



이 연극은 70분 동안 별다른 대사 없이 배우들의 동작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배우들의 움직임은 아름다운 춤이 되었다가 격렬한 움직임이 되기도 해요.

현대무용이나 마임을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아니에요. 대사가 절제되어 있을 뿐, 없는 것은 아니거든요.

대사의 빈자리는 2인조 라이브 밴드의 섬세한 음악으로 가득 채워진답니다.

관객은 70분 동안 대사가 없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기 힘들어요.     



이제 작품 속 한 남자의 인생 이야기로 들어가 볼게요.     



무대 위 구석에 남자가 앉아 있어요. 

그 남자는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네요.

남자는 55세, 조기 치매환자예요.

남자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듭니다.

"아빠" 

바로 딸의 목소리예요. 딸은 아빠의 생일날 아빠가 입을 옷을 챙기고 있었어요.

남색 재킷에 빨간 넥타이. 딸은 아빠에게 이야기하죠.

"아빠, 재킷은 여기 옷장 맨 앞에 걸어 두었어요. 빨간 넥타이는 주머니에 있어요."

걱정 어린 목소리로 두어 번 더 이야기를 해요. 남자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입니다.   


  

딸이 돌아가자 남자는 다시 기억을 하려 애써요.

하지만 빨간색이란 단어만 머릿속을 맴돌게 되죠. 어디선가 '재킷'이란 소리가 들려요.

남자는 일어서서 재킷을 입어요. 하지만 남자가 입은 것은 딸이 말한 재킷이 아니에요.

그건 남자의 학창 시절 교복이었어요.     



남자는 이제 학창 시절 기억 속으로 들어갑니다. 

주위로 친구들이 쏟아져 들어와요. 웃고 떠드는 친구들, 조용히 하라고 책상을 치시는 선생님, 학교가라고 깨우는 엄마의 얼굴.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던 날의 에피소드,

기억은 빠른 속도로 감기는 화면처럼 쉴 새 없이 돌아가다가 멈추기를 반복해요.

늘어졌다 당겨진 고무줄처럼 여기저기로 튕겨 나가기도 하죠.    


 

남자는 기억을 놓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어요. 

하지만 순간순간 기억을 반복하다 이내 엉키고 말아요.

한 남자의 기억은 어느새 저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어요.

저에 외할머니는 ‘파킨슨병’을 앓다가 돌아가셨거든요.    


  

여든을 넘어 사셨던 외할머니의 삶 속에는 육 남매 자식과 남편, 그리고 일제 강점기부터 21세기까지 이야기가 빼곡히 담겨 있어요.

할머니는 기억을 조금씩 잃으셨어요. 그 많은 기억을 한꺼번에 놓기 싫으셨던 것 같아요.

할머니는 자신이 기억해 낼 수 있는 만큼만 기억을 떠나보내셨고 그 기억이 다 닳아 없어질 무렵 돌아가셨어요.

하지만 할머니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늘 새로운 추억으로 남아 있답니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한 남자의 기억이 지워지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어떤 기억을 만들며 살고 있는지 묻고 있어요. 기억이 사라지는 순간이 와도 우리는 새로운 기억을 만들며 살게 된다는 위로를 전하기도 한답니다.  

망각은 어쩌면 새로운 기억을 쌓아가는 여정 일지 모르겠어요. 기억이 사라진다고 해도, 또 그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난다고 해도 그 위로가 우리에게 희망이 되어주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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