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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정 Jun 01. 2022

극단 '고래'의 연극 <고래>

'고래가 고래 했다'



연극이 끝나고 '관객과의 만남'이 있다고 했다. 부러 이 자리를 참여하겠다고 간 것은 아니었다. 연극을 사랑하지만 이런 자리는 부담스러워하는 사람 중 하나다. 누가 참석하라고 등 떠미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온다고 이유를 물을 사람도 없다. 하지만 별다른 이유 없이 연극이 끝나고 자리를 뜨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그날은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과 관객과의 만남이 있는 날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관객들의 연령대는 20대에서 30대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나라는 분단된 상태였고, 태어날 때부터 북한은 북한이었고 남한은 대한민국이었다.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이가 좀 더 있기는 하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반공 글짓기와 반공 포스트, 반공 표어 대회가 매년 중요 행사였던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는 거다. 



반공 글짓기 대회에서 남다른 두각을 보였던 나는 매년 최우수상을 받으며 교단 위에 섰었다. '무찌르자 공산당'을 그림으로 그리며 반공 교육을 받고 자란 내가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대학을 가서였다. 하지만 여전히 북한은 낯설고 어색한 이름이다.  나보다 더 북한이 낯선 이 젊은 세대들에게 이 연극이 어떻게 보였을지 궁금해졌다. 연극이 끝나고 자리를 뜨지 못했던 것은 그 이유가 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선입견과 편견은 내게 있었다. 관객들은 연극을 죽음 앞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념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한 사람의 신념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로 이해하고 있었다. 세상을 좀 더 살았다는 어쭙잖은 어른병에 걸려 북한 잠수정이 배경인 이 이야기가, 대사에 몇 줄 차지하는 사회주의 이념이 젊은 관객들에게 반감을 갖게 하거나 불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오지랖을 떨고 있었던 거다.





연극은 강원도 속초 앞바다에 떠있는 북한 잠수정 속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1998년 6월 22일, 무장간첩 9명을 태운 북한 잠수정이 속초 앞바다에서 꽁치잡이 그물에 걸려 표류했던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장과 기관장 그리고 무전장이 임무를 위해 육지로 올라간 저격수들을 기다리고 있다. 임무를 마친 저격수들이 무사히 잠수정으로 들어오자 다시 북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한다. 긴장 속에서 북으로 돌아가던 중 잠수정에 문제가 생긴다. 한국 어선이 뿌리고 간 꽁치잡이 그물이 잠수정의 추진 날개에 휘말리고 만 것이다. 



방법은 하나다. 잠수정을 바다 위로 올리고 사람이 나가 추진 날개에 걸린 그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 낸 북한 잠수정은 결국 한국 어선의 눈에 띄게 되고 한국 해군에게 발견되고 만다. 투항하면 살려준다는 한국군의 경고에 잠수정 속은 갈등에 휩싸인다. 투항하여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을 각오를 하고 북으로 전진할 것인가. 기관장은 잠수정을 전 속력으로 북으로 향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잠수정은 한국군의 공격을 받고 멈춰 선다. 





잠수정 속은 이제 삶과 죽음이 뒤엉킨 공간이 된다. 끝까지 신념을 지키겠다는 사람, 일단 살고 봐야 한다는 사람, 살고 싶다는 사람,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사람. 모두의 선택은 달랐지만 결과는 같았다. 실제 당시 인양된 북한 잠수정 속에는 9명 모두 서로를 쏘거나 자살한 상태였다고 한다.  



죽음 앞에 선 사람들의 갈등은 극한으로 치닫고 결국 모두 죽게 만들었다. 극한으로 치닫는 모든 갈등은 결국 모두를 죽게 한다. 그것이 한 가정이건, 한 사회이건, 한 국가이건 말이다. 그렇다면 그 갈등은 어디에서 올까. 그 갈등이 선입견과 편견에서 온다면 해결의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그 갈등이 혐오에서 온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좌'아니면 '우', 우리 편 아니면 네 편, 찬성 아니면 반대, 맞거나 틀리거나. 이 주홍글씨보다 더 선명한 이분법의 편 가르기는 우리를 조금씩 죽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작품이 어느 쪽의 이야기일 거라 단정 짓는 내가 그러하듯. 



문득 연극 <고래>의 '고래'가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고래가 잠수정을 닮은 것도 같다. 수천만 년 이상 지구에서 살아남은 고래는 거대한 몸집으로 바다를 헤엄치며 지구를 지키고 있는 동물이다. 고래는 몸속에 탄소 저장 체계가 있는데 평균 60여 년을 사는 고래는 사는 동안 몸에 탄소를 축적한다. 그리고 죽을 때는 한 마리당 평균 33t이나 되는 탄소를 가지고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다. 그래서 고래의 멸종을 막아내는 것은 지구의 희망을 살리는 일이기도 하다. 갈등과 반목은 가라앉고 공감과 연대가 희망처럼 떠오르길, 고래에게 희망을 걸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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