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숙정 Sep 23. 2022

나는 안전거리가 자주 필요한 사람입니다

내성적인 자아를 위하여



요즘 <내밀 예찬>이란 책을 읽고 있다. 


우선 책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은밀함보다는 훨씬 건전(?)하게 느껴졌고 심지어 신비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거나 내성적인,  MBTI로 표현하자면 확실한 'I'인 내 눈에 단번에 꽂힌 제목이었다. 사실 내성적인 성향에 큰 불만 없이 살고 있다. 엄청나게 좋을 것도 없지만 이런 성향 때문에 고통받거나 하지는 않아서다. 내성적인 성향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는 일이 많지 않은 것은 직장 생활보다 혼자 하는 일을 해서이기도 할 거다. 아무래도 직장 생활에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나 같은 성향은 '미운 오리 새끼'가 될 확률이 높을 테니까 말이다. 



혼자 하는 일은 내성적인 성향과 더없이 찰떡궁합이다. 혼자 조용히 일을 해야 하는데 자꾸 엉덩이가 들썩거린다고 생각해보라. 하루 종일 음식을 씹는 행위 외에 구강운동을 하지 않는 상태를 못 참는 성향이라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 될까. 다행히 하루 종일 울리지 않는 전화음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집사임에도 고양이와 나누는 흔한 대화조차 거추장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니 내 성향과 내 일은 찰떡궁합인 셈이다. 



내가 얼마나 내밀한가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공연이나 전시를 보러 나가는 일을 제외하고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아니 한 달 동안 밖을 나가지 않을 때도 있다. 나는 코로나가 인간관계 사슬을 끊어 놓기 훨씬 이전부터 자발적 고립을 즐기며 살았다. 자발적 고립은 내성적인 내가 타인과 대면하며 생기는 불편함을 없애줬다. 하지만 반드시, 혹은 의무적으로라도 자발적 고립을 해제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유치원 버스에서 내리면 친구들과 놀고 들어가는 것은 필수 코스다. 내 아이만 고립시키겠다는 계획이 아니라면 친구들과 놀이는 아이 성장에 필수적이다. 내가 내성적이라 해서 아이의 사회화를 막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거의 강아지 산책시키는 주인처럼 아이 손에 끌려 놀이터로 직행이다. 



놀이터 주변에는 엄마들도 삼삼오오 모여 있게 마련이다. 엄마들 모임 구성은 같이 놀고 있는 아이들에 따라 구성된다. 자주 함께 노는 아이라면 그 엄마와도 일면식이 있지만 놀이터에서 즉석 만남을 가진 경우라면 엄마끼리도 즉석만남이 이루어진다. "어머, 어쩜 아이가 저렇게 키가 커요?"라며 상대편 엄마가 접근해 오면 안도감에 가슴이 '쿵' 내려앉곤 한다. 반대로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때부터 머릿속을 뒤지기 시작한다. 적절한 문장과 대화 시작점을 찾느라 그야말로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순간이다. 



학교를 보내고 나니 학년초 학부모 모임이 또 다른 미션이 됐다. 직장을 다니지 않으니 학부모 모임 때문에 회사를 반차 내거나 할 이유가 없다. 잠시 가서 학교 분위기도 파악하고 선생님께 인사나 하고 와야겠다는 마음으로 학부모 모임을 간다.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벗어나고 만다. 학교 행사를 그럭저럭 마치고 나니 엄마들은 따로 모여 커피 한잔 마시고 가자고 하는 거다. 여기서부터 내성적인 자아는 일대 혼란이 시작된다. 

- 저기를 들렀다 가?

- 지금 일이 있다고 갈까?

- 언제 말을 꺼내지?

거의, 아니 늘 나는 그 말을 꺼낼 타이밍을 놓치고 모임에 끼고 만다. 



그렇다고 사람이 매 순간 매사에 내성적이거나 외향적이지 않다. 

그런 사람은 없을 거다. 모든 사람들은 다중적인 면을 갖고 있다. 내성적인 부분이 있다면 어떤 부분에서는 신기하게 외향적인 면이 나타난다. 아무리 외향적인 사람도 자신만의 고요한 시간을 즐기거나 고독을 탐닉하려는 욕구가 있다. 대중 속에서 살아가는 배우들도 의외로 자신은 낯을 가리고 내성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늘 밝고 사람 좋아하는 사람도 고독한 자아를 불쑥 꺼내놓을 때가 있다. 



나 역시 혼자 일을 하고 혼자 전시를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사람들과 밤새워 이야기하는 술자리도 좋아한다.

낯선 사람들이 여럿 모인 곳에서는 말 한마디 꺼내기도 힘들지만 만난 적도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인터뷰할 때는 겁이 없다. 한번 이야기가 힘들지 얼굴을 익히고 마음이 맞으면 그다음부터는 일부러 모임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러니 외향적인 사람이건 내성적인 사람이건 뼛속까지 한 면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외향적 또는 내성적인 성향은 그 사람의 평균값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우리들은 모두 다 자신만의 안전거리와, 안정 거리가 있다. 

양팔을 뻗어 한 바퀴를 돌면 생기는 정도의 거리, 딱 그만큼의 마음의 거리와 공간이 있어야 안정감을 느낀다. 내성적인 사람도 외향적인 사람도 딱 그만큼의 거리가 필요하다. 내성적인 사람은 그 안전거리가 자주 필요한 것이며, 외향적인 사람은 그 안전거리가 가끔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그 안전거리가 좀 더 크거나 좀 더 작을 수도 있다. 외향적이거나 내성적이거나 우리는 그저 자신만의 안전거리가 필요하다. 내성적인 나 역시 그저 남들보다 안전거리가 좀 더 크고 좀 더 자주 필요한 사람일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짜파게티 드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