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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정 Oct 08. 2022

벌새의 둥지는 2cm 크기입니다

당신의 집은 몇 평인가요?

"집이 몇 평이세요?"

우리는 집의 크기를 평수로 확인한다. 이 평수는 단순히 집의 크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몇 평'이냐는 얼마만큼의 부와, 얼마만큼의 삶의 여유를 가졌는지와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아주 가끔이지만 집의 평수는 사는 사람의 인성과 가치를 대변해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기는 하다.



가까운 과거, 조선시대로 돌아가면 우리 조상들은 집을 '칸'으로 표현했다. 대군은 60칸, 일반 서민은 10칸을 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양반들의 경우 100칸이 넘는 집도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계급에 따라 소유할 수 있는 집의 칸이 정해져 있었으니 이 '칸'은 단순히 집의 규모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계급과 권위뿐만 아니라 그 시대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뜻하기도 한다. 



"할아버지는 몇 평에 사세요?"

"나는 한 평에 살아. 너는 몇 평에 사니?"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꼬마 아이의 질문에 한 평에 산다고 답을 했다는 노 학자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바가 있다.



"너희 집 어디야?

"00 주공 아파트"

"아, 거기? 넌 발은 뻗고 자냐?"

20평대 주공아파트에 사는 자신에게 중학교 친구들이 그랬다는 이야기를 어떤 학생에게 전해 들은 바도 있다.



"엄마, 우리도 넓은 집으로 이사 가면 안돼?"

"넓은 집 대신 세상에서 제일 예쁜 집을 만들어 줄게"

30평대 브랜드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온 초등학교 2학년 시절 큰 아이의 이야기였다.





옛날의 그 집



빗자루 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박경리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중 일부이다. 박경리 선생님에게 집은 몇 평도 아니고 몇 칸도 아니고 나무와 동물과 삶이 공존하던 공간이었다. 몇 평에 사냐고 묻는 요즘 어린아이에게 인간이 사는 데는 고작 '한 평'의 공간이면 된다는 노 학자의 이야기는 집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여전히 우리에게 집은 영끌해서 투자할 가치가 있는 부동산이고, 여전히 우리에게 집은 재산으로 등치되는 허공에 뜬 유형물로 존재한다. 가끔은 땅에 있지도 않고 허공에 떠있는 수백, 수천의 유형물이 수억, 수십억을 오르내리는 것을 보며 헛헛할 때가 있다. 하기야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가상공간을 돈으로 사고팔기도 하는데 허공에 뜬 아파트는 형체라도 있으니 말이 되지 싶기도 하다.






새벽의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유튜브에서 명상음악을 찾았다. 고요한 음악과 함께 작은 둥지에 몸을 실은 새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참 작은 집이네? 저렇게 작은 공간만으로도 새는 살 수 있나 보네.' 문득 새들의 집이 궁금해졌다. 새들에게도 집에 대한 권리가 있다면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며 아는 새에게 집을 넘기는 대가로 벌레 몇 마리 정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잡스런 생각을 해보았다. 다행히 새들에게 그런 것은 없다. 



새들의 집은 새의 몸 크기와 비례한다고 한다. 벌새의 집은 고작 2cm에 불과하지만 독수리의 집은 2m가 넘기도 한단다. 독수리는 이동을 하지 않고 붙박이로 살기 때문에 오랜 세월 새로운 재료를 더 얹어 더 좋은 환경으로 집을 키우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가 트여 있는 새집이 있고 입구를 아래로 낸 원통형 집, 길쭉한 집을 짓는 새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새들은 집의 모양도 다르지만 짓는 장소도 차이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도  새가 살아온 환경이나 생활방식에 따라서가 아닐까 싶다. 



나에게 집은 벌새의 2cm 둥지다. 고요히 내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는 공간, 집 앞 시장에서 장바구니에 소박한 찬거리를 살 정도의 지리적 위치, 앞으로 삐걱댈 일만 남은 낡은 육체로 먹고 살 일터에 나갈 수 있는 정도의 교통편, 산과 나무가 지척은 아니어도 흐릿한 시야에 들어 올 정도의 자연친화적인 곳이면 된다. 인간은 욕망 덩어리라 아니라고 아니라고 도리질 쳐도 온갖 편의사항을 다 챙기기는 한다. 이사 경력으로 치면 주민등록주소란을 두 번은 갈아치운 것 같다. 스스로의 선택도 있었고 내 의지와 상관없는 경우도 있었다. 아마 후자가 더 많았으리라. 그 많은 이사 경력으로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나는 정말 벌새의 2cm 둥지이면 족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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