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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정 Sep 03. 2022

'엄마'와 '아리랑'과 '김광석'

기억하지 않아도 기억되는 것들




엄마는 주부였고 지금도 주부다. 

"엄마는 뭐하셔?"란 질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족을 위해 매 끼니 밥을 차려내는 일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시장에서 콩나물 몇 가닥을 더 담는 것을 가지고 시장 아주머니와 언성을 높이는 엄마와 늘 거리를 두고 서있었다. 온갖 집안일에 아빠의 뒤치다꺼리는 몹쓸 업보처럼 엄마를 쫓아다녔다. 자연스레 엄마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보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오늘이 어제 같은 엄마의 삶은 어린아이의 눈에 소득 없이 분주하고 한없이 고단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아리랑'을 들으면 엄마가 떠오른다. 

무한정 늘어지는 '아리랑'의 가락이 한없이 고단한 엄마 같았다. 나를 버리고 가는 사람의 뒷모습까지 챙겨주는 이의 오지랖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랬던 '아리랑'이 전후 배경도 없이, 인과관계도 없이 가슴으로 '훅' 들어왔다. 아리랑이 코끝 찡하게 다가온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우리 DNA를 흐르는 정서, 엄마의 엄마, 그 엄마의 엄마로부터 전승된 정서가 우리 몸속에 흐르는 것이 아니고서야 이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싶다.



우리에게는 그런 것들이 있다. 

공기처럼 부유하며 우리 삶이 되어버리는 것들 말이다. 

'엄마'가 그렇고, '아리랑'이 그렇고 내겐 '김광석'이 그랬다.  살아생전의 김광석은 텔레비전 프로그램 어딘가에서 본 것이 전부였다. 기타 하나 달랑 메고 노래하는 수수한 청년은 가수라기엔 지나치게 평범해 보였다. 만연체 노래 가사는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흑백텔레비전 속 청년의 노래는 흑백의 무채색과 닮아 있었다.



그 지나치게 평범했던 김광석을 다시 만난 것은 소극장 학전블루에서다. 김광석의 이름 앞에는 죽은 이에게 붙이는 '고'가 붙어 있었고 그의 얼굴은 청동 조형물로 공연장 앞에 놓여 있었다. 소극장 학전블루에서는 고 김광석을 기리는 음악회가 매년, 매 시즌 열렸다. 왜 사람들이 김광석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지를 알게 된 것은 뮤지컬 <그날들> 덕분이다. 대중성이 검증된 노래들을 엮어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든 작품을 주크박스 뮤지컬이라고 한다. 뮤지컬 <그날들>은 대표적인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이 작품은 단 한 사람, 고 김광석의 노래로만  만들어졌다. 










변해가네, 혼자 남은 밤, 그녀가 처음 울던 날,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끝나지 않은 노래, 그날들, 부치지 않은 편지 등.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그 노래들은 모두 김광석의 노래였다. 한 편의 이야기로 엮어내라고 만들지 않았을 텐데 찰떡같이 그 상황에 그 노래가 되는 것은 연출가의 능력이 크겠지만 김광석 노래의 힘이기도 했다. 유행가 가사의 숙명이 그런 것이겠지만 고 김광석의 노래는 순간 사람을 잡는 매운 맛보다 뭉근한 사골 맛에 더 가깝다. 이것이 사람들이 김광석을 기억하고 노래하고 추억하는 이유다. 



'엄마'와 '아리랑'과 '김광석'은 오랜 시간 우려낸 감성으로 내 안에 존재한다. 

굳이 기억하겠다 벼르지 않아도 기억되고, 혼자인가 싶으면 어느새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런 존재. 특색 없는 명사이지만 어느 글에나 빠지지 않는 그런 고유한 명사. 연관성 없는 세 단어가 굴비 엮듯 추억 속에 엮어지는 것은 나 역시 그런 뭉근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어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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