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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정 Sep 01. 2022

당신의 기억을 기억할 수만 있다면......

노년의 병을 그린 연극 이야기






하루는 손에 자동차 열쇠를 들고 자동차 열쇠를 찾고 있었다. 

"뭘 그렇게 찾아?"

"자동차 열쇠를 어디 뒀는지 모르겠어? 분명 챙겼는데?"

"손에 든 건 뭔데?"



또 하루는 리모컨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하지 못해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또 다른 하루는 서류를 찾기 위해 방으로 갔다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잊고 다시 방을 나와야 했다. 

소소한 건망증이라지만 손에 든 물건을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온 집을 수색하며 돌아다니다 결국 내 앞에 놓인 리모컨을 발견하는 것 역시 슬픈 일이다. 



슬픔의 정체는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과,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에 있다. 

건망증조차도 그러한대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기억을 잃어간다는 사실조차 잊게 된다면 그것은 또 어떤 것일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 사람의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또 얼마나 힘겨운 일일까?




기억을 잃어간다는 것은 나를 잃어간다는 뜻이다




기억을 잃어간다는 것은 나를 잃어간다는 뜻일 거다. 나는 수십 년을 살아온 시간의 결정체다. 아픔과 슬픔, 기쁨과 환희의 순간이 모여 비로소 내가 된다.  그렇게 살아온 경력이 쌓여 내가 되는 것이다. 물론 살아온 기억들이 모조리 쌓이기만 하지는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오랜 기억은 새로운 기억에 자리를 내줘야 한다. 오늘 기억이 들어서면 아주 오래전 어느 날의 기억은 떠나간다. 행복한 기억은 아픈 기억을 대체한다. 행복한 기억이 살을 도려내는 아픈 기억을 밀어내기에 우리가 산다. 그렇게 기억은 자리를 내어주고, 잊히고, 망각되고, 또다시 생성되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기억을 잃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기억을 잃어가는 누군가를 지켜봐야 하는 일은 더욱 혼란스럽다. 파킨슨병을 앓으셨던 할머니는 아주 조금씩 기억을 잃으셨다. 할머니의 기억이 속력을 내서 사라지자 자식들의 갈등도 함께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자신을 굶겼다고 어깃장을 놓는 할머니와 싸운 이모는 엄마에게 한풀이를 하곤 했다.

"아니, 밥을 드셔 놓고 밥을 안 줬다고 하니 미칠 일이지."

"노인네가 갈수록 왜 그래."

"일하는 아줌마가 먹을 거를 숨기고 안 준다는 거야."

"아줌마가 그랬어?"



기억을 잃어가는 병, 외형의 상처가 없는 뇌 속에 상처. 내가 낳은 자식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 아니 자신조차도 알아보지 못하는 공허한 고통. 연극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는 그 공허한 고통을 느끼게 한다. 연극 속 엄마는 요양원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에 아들이 자신을 데려갈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는 것이다. 외출복을 다림질하며 엄마는 아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들 베르너의 어린 시절 이야기, 지난 시절 힘들었던 이야기, 농장에서 있었던 이야기. 엄마의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 그래야 한다면 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크리스마스에 아들 집에 가서 손주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낼 거라 믿었던 엄마의 생각은 이뤄지지 않는다. 아들은 엄마를 데리러 온 것이 아니었고 엄마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상태였다. 엄마의 시점에서 흘러가던 이야기는 점차 과대망상과 환각, 환청을 보이는 엄마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왜곡된 기억들, 반복되는 질문과 반복되는 기억들로 이야기는 순서 없이 뒤섞이고 만다. 



그렇다고 모든 노년의 병이 우울하고 슬프지는 않다. 연극 <첫사랑이 돌아온다>을 보면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연극은 노년의 병, 치매 노인들의 달콤한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억을 잃어버린 김수동 할아버지가 우연히 만난 이명순 할머니를 첫사랑으로 착각하고 만다. 할머니는 어느새 자신을 첫사랑이 우기는 할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게 된다. 



한 병원의 치매 병동에서 일어난 두 노인의 첫사랑 아닌 첫사랑 이야기는 인생의 해프닝을 다룬 작품이 아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 부정하고 싶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와도 삶은 계속 돼야 한다. 그래야 한다면 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노년의 병을 그린 두 편의 이야기는 먼 후일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 사랑하며 살 것을 알려준다. 



엄마는 나이가 들면서 부쩍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시는 일이 잦아졌다. 엄마의 엄마가 파킨슨병을 앓았다는 것이 늘 자신의 모든 신체 변화를 경계하게 하는 모양이었다. 예전처럼 엄마의 옛이야기를 들을 기회도 줄었다. 매일 밤 엄마의 바짓가랑이 속으로 숨어 들어가 듣던 이야기를 이제는 엄마조차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셨다. 문득 엄마의 기억을 내가 대신 기억할 수만 있다면, 당신의 기억을 내가 대신 기억하고 또 기억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사부작사부작 기록하는 이야기가 엄마의 모든 기억을 대신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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