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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정 Sep 09. 2022

이제 '82년생 김지영'을 떠나보내야 할 때,






이제는 명절이라고 시댁을 가지 않는다. 시댁을 졸업할 나이가 되어서는 아니다. 물론 나이가 오십을 넘어서면 웬만큼 결혼 생활을 한 친구들도 선별적으로 시댁을 간다. 당일치기로 다녀오거나 아이들 시험 때문에 안 가거나 남편만 보내는 친구도 등장한다. '이제 명절에는 시댁을 가지 않겠다'라고 선언하며 시댁을 가지 않는 친구도 있다. 결혼 연차가 늘어갈수록 다양한 사연으로 선택지가 넓어진다. 그러고 보면 결혼 초에도 명절 행동 수칙을 선언해도 되는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때늦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명절의 기억은 결혼 전과 결혼 후로 극명하게 구분된다. 결혼 전 명절은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기회다. 대용량 프라이팬에서 막 구워진 전을 먹는 기쁨은 명절만의 호사였다. 막 구워진 전은 기름이 살짝 배어 있고 바삭함이 최대치이기 때문에 그 맛이 최고다. 엄마는 제사상에 오를 음식이라고 잔소리를 하셨지만 손은 잠시도 쉬지 못하고 전을 부치고 계셨다. 엄마의 노동이 명절 한상차림 속에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결혼 전 명절이 엄마의 노동으로 누리는 해방이었다면 결혼 후 명절은 내 노동으로 타인을 해방시키는 날이었다. 명절이면 싱크대 앞에서 새벽부터 잠들기 전까지 서 있어야 했던 기억은 솔직히 끔찍했다. 아침밥을 차리고 치우고 나면 다시 차와 다과를 차려야 한다. 다과상을 치우고 나면  누군가 전이 먹고 싶다고 한다. 전과 함께 한상 차림이 끝나면 아이들이 간식을 달라며 쪼르르 달려온다.  





엄마의 노동이 명절 한상차림 속에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다시 점심을 차리고 치우고 나면 다시 전과 과일을 내놓고 다시 제사 준비를 하고 저녁을 차리고 치우고 나면 과일을 내놓아야 하고 저녁을 못 먹은 누군가의 밥상을 또 차린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무리가 밥상을 휩쓸고 가면 또 다른 무리가 나타나 밥상 앞에 앉아 있다.



며느리가 많으면 이 노동이 1/n이 될까? 그렇지 않다. 정확하게 명절의 노동은 '며느리 수 곱하기 n'만큼 늘어난다. 두 형님이 일을 한다고 막내가 일을 쉬고 놀 수는 없다. 눈치껏 설거지통이라도 붙들고 있거나 대형 프라이팬을 선점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 집안 사정에 따라 일을 하고 늦게 합류하는 며느리가 있기도 하다. 그렇게 되면 명절 노동 강도는 '며느리 수 곱하기 n제곱'으로 상승한다.



'이제 그만들 먹지.'

말이 되어 나올 수 없는 말들을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이고 있었다. 문득 싱크대 개수구 아래로 똬리를 틀며 쌓이는 음식물 찌꺼기를 한 움큼 주워다 냅다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이 손가락 끝을 맴돌다 사라졌다. 그 우둔하고 조신한 '며느리 되기'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비로소 봉인해제되고 만다.



그렇게 선한 아내, 착한 며느리, 좋은 엄마이기 위해 마음속에 켜켜이 쌓아 놓은 응어리가 몸에 병을 만들었다. 그 흔한 칭찬도, 수고했다는 형식적인 토닥임도 없었던 시간들은 나를 향한 비수로 돌아왔다. 집이란 울타리 안에서 죽어도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공포감이 밀려왔다. 세상은 달라지는데 나만 그냥 그 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막막함은 몸에 병을 키워냈다.





지영의 삶이 나의 삶과 평행이론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책 속의 그림들을 눈앞에 펼쳐 놓은 듯했다. 사실 영화는 책 보다 곱고 순하다. 책은 현실보다 더 곱고 순하다. 영화 속 명절 에피소드는 이야기 속 사건의 시작점이기도 하지만 내 기억 밑바닥에 묻어 두었던 우둔하고 바보 같았던 지난날의 복사본이기도 했다.



지영의 삶이 엄마와 나의 삶과 평행이론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그래서 영화를 보며 더 슬펐는지도 모르겠다. 세월이 흘렀어도 세상이 변했다고 해도 여전히 수많은 지영이는 아프다. 여전히 선택이 아닌 포기를 먼저 해야 한다. 여전히 수많은 지영이들은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치며 산다.



세상 사람 다 그렇게 사는데 왜 너만 유난이냐며 질문도 아닌 질책을 던질 테지만, 세상 사람 다 왜 그렇게 살아? 안 그렇게 살아야지. 왜냐고 묻는 게 유난이라면 유난 떨며 살아야지. 명절 독립 선언을 하고 여행을 떠나고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는 친구들의 소식은 이제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다. 진즉 그러지 못하고 나이 들어 갖게 되는 여유라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세상이 변하면 많은 것들이 변한다. 이전의 가치는 사라지고 새로운 가치가 자리 잡는다. 전통은 소중하지만 영원할 수 없다. 오늘의 가치가 수십 년 후 낡고 불합리한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엄마와 나의 삶은 평행이론 한가운데 있었지만 딸들의 삶은 전혀 다른 곳에 존재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싶다. '82년생 김지영'은 이제 책과 영화 속에서만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다.




영화 <82년생 김지영>포스터, 나무위키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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