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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정 Oct 12. 2022

거절을 거절합니다

거절 반사!!




띵똥~~ '이번에는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유감입니다.' 

좋게 말해 거절이지 실상은 탈락 혹은 불합격의 또 다른 정중한 표현이 되겠다.

띵똥~~ '이번에는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유감입니다.' 

띵똥~~ '이번에는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유감입니다.' 

각각 이유는 다르지만 답변은 대동소이하다. '좋은 글이지만 이번에는 함께 하지 못하게 되어 유감이라는' 너무 거만하지도 않고, 너무 비굴하지도 않은 중간 지점을 잘 잡은 격식 있는 답변이 돌아온다.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이번에도 다시.



이쯤 되면 상대가 아니라 나는 의심하게 된다.

- 내 생각이 잘못된 거 아닐까?

- 내 능력으로는 안 되는 일인가 봐!

- 이 정도면 포기하라는 뜻인데?



다시 '거절'을 대신하는 세련된 답장이 돌아왔다. 거절은 곧 실패를 뜻한다. 실패를 했다는 것은 도전을 했기 때문이라는 자기 계발의 정답은 알고 있다. 실패는 포기했을 때 실패이므로 포기하지 않으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과정이 된다는 또 다른 정답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거절에는 백신도 없고 면역력도 안 생긴다. 매도 맞으면 맷집이 늘어난다는데 이 놈의 거절은 도통 맷집이 생기지가 않는다. 지천명을 넘어서도 거절 뒤에 후폭풍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내가 비싼 밥 먹고 왜 매번 '거절'을 당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니 무척 억울해졌다. 이 거절의 원인을 찾아 없애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거절의 시작은 내가 글을 쓰면서 시작됐다. 글 쓰는 것을 다시 시작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내가 다시 글이란 것을 쓰게 될 거라고는 나조차도 생각을 못했다. 머릿속은 하고 싶은 이야기로 가득 찼고, 손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들이 쌓였을 뿐이었고 우연하게 다가온 기회를 덥석 잡아버린 것뿐이었다. 



그 후로도 9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글을 그만 쓰셔도 된다는 신문사의 이야기가 나올까 두려워 9년 동안 단 한 주도 쉬지 않고 글을 들이밀었다. 때론 내 글이 부족한 신문사의 지면을 채워줬을 터이다. 때론 중요한 기사에 밀리고 밀려 3,4일이 지나고 나서야 글이 올라가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거절을 생각할 수 없도록 매주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글을 들이댔다. 



특별하게 잘나지도 그렇다고 특별하게 못나지도 않은 탓인지 책도 내고 지금껏 글을 쓰고는 있다. 물론 책으로 이름을 날려 보지 못했고, 하고 있는 일에 전문가를 달고 있지도 못하다. 그렇다고 '능력 없다'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없다. 잘하는 것도 아니고 못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중간, 펜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알아차릴 사람 없는 존재감, 앞으로 나가기엔 턱도 없지만 뒤로 물러나기엔 지나온 시간이 속상한 속세의 욕심으로 가득한 마음. 



이 무중력과 같은 상태를 탈출하고 싶어서 여기저기에 또다시 글을 들이밀었다. 그러니 내가 지금 시간차로 맞고 있는 '거절'의 원인은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인 거다. 그러면 해결책도 뻔하다. 이것을 안 하면 된다. 이제 내가 글 쓰는 일을 포기하거나 여기저기에 글을 들이미는 짓을 안 하면 된다. 이것만 결정하면 문제는 해결된다. 








글 쓰는 일을 포기하려니 내가 죽을 것 같아 안 되겠다. 생각이 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면 어딘가에 쏟아내지 않으면 생각에 먹혀버릴 것 같을 때가 많다. 그러니까 글 쓰는 일은 나에게 욕구를 분출하는 행위다. 산에 오르는 육체적인 행위를 즐기지 않고, 노래방 마이크를 잡고 소리를 토해내는 것도 관심이 없다. 음악에 몸을 싣고 리듬을 즐기기에 내 몸은 음악성이 제로에 가깝다. 내가 할 수 있는 내 욕구의 분출구는 글을 쓰는 행위뿐이다. 그러니까 포기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무중력 상태의 나도 못 참겠다. 다시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아까보다 더 복잡해진 느낌이다. 포기는 싫고 거절은 더 싫고. 



며칠을 고민한 끝에 꼼수 같은 나만의 생존전략을 찾았다. '당신의 거절을 거절합니다' 즉 거절 반사다. 내가 거절을 반사한다고 상대가 거절을 철회할 리도 없고, 내 거절 반사를 상대가 알 수도 없다. 마음에 위안이나 얻자고 하는 것도 아니다.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어떤 위로의 말이나 처방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거절 반사에는 '당신의 거절은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도 들어 있고, '그런다고 내가 기죽을 것 같으냐'는 마음도 들어 있다. 거절에 대한 나의 선택은 포기가 아니라 '거절 반사'다. 어린 시절 친구가 내게 하는 말에 '반사'를 외쳤던 기억이 있다. 장난 삼아 외쳤던 이 말은 생각보다 더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었다. 친구와 집에 오는 내내 수도 없이 서로 '반사'를 외치며 마지막으로 그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반사'를 외치고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이젠 나를 보호할 보호막으로 '거절 반사'를 외친다. 이 '반사'는 절대 상대방이 외치지 못한다. 그러니 내가 도망갈 필요가 없다. 여유롭게 내 상처를 치유하고 그다음을 생각할 시간을 가지면 된다. 



나는 거절을 거절합니다! 거절 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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