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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정 Sep 29. 2022

진순이가 간 자리에 토토가 왔다

집사와 견주를 모두 실패하고서야 깨달은 놀랍지도 않은 진실에 대해



진순이는 '선물처럼' 이 아니라 선물로 우리 집에 왔다. 

산타 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우리에게 주고 가셨다. 아니 그렇게 각본을 짜고 그 아이, '진순이'는 우리 집에 왔다. 아주 흔해빠진 각본이었다. 



일곱 살까지 혼자 크고 있던 큰 아이는 외동이라 고집이 세고 자기중심이라는 주변에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대놓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어도 늘 이야기 끝에는 '아이가 혼자라서'라는 표현이 붙었다. 그 말은 그 뜻을 미루어 짐작하게 했고 혼자인 아이를 위해 동물 친구를 선물하기로 했다. 일곱 살이니 한창 산타할아버지를 믿을 때였다. 산타 할아버지를 내세워 동물 친구를 선물할 깜찍(?)한 계획을 세웠다. 아이에게는 올해 착한 일 많이 하면 산타할아버지가 '강아지'를 선물해 주실 거라고 했다. 



아이에게는 지나가는 말로도 약속을 쉽게 하면 안 된다. 

어른들은 바쁜 일상 속에서 약속을 잊고 사는 게 다반사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약속한 말은 글자 하나 놓치지 않고 매일, 매 시간 기억하며 지낸다. 일 년의 시간이 흘러 산타가 등장해야 할 그날을 며칠 앞두고 아이는 내게 편지를 내밀었다. 



'산타 할아버지에게'로 시작하는 아이의 서툰 편지는 산타에게 보내는 '선물 요구 서한'이었다. 이렇게 저렇게 자신이 일 년 동안 착한 일을 했으니 이번에는 귀여운 강아지를 선물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산타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달라고 내미는 아이의 눈은 진짜 산타에게 보내달라는 뜻인지, 아니면 엄마가 대충 알아서 준비를 해달라는 뜻인지 알쏭달쏭할 뿐이었다. 어쨌거나 일 년 전의 약속을 아이는 정확하게 기억을 했고 나는 '강아지'를 찾아야 하는 시급한 과제가 생겼다. 



강아지는 애견샵을 통해 찾으면 되지만 문제는 이 생명체를 어떻게 크리스마스날 아침에 선물처럼 등장시키는가였다. 미미의 옷장이면 미리 사놓고 창고에 넣어두면 되는데 강아지는 그럴 수 없으니 말이다. 치밀한 나의 계획은 이러했다.



아이는 잠을 잘 자는 편이라 8시면 잠자리에 든다. 산타 할아버지가 오셔야 하니 일찍 자라고 하면 될 것이다. 두 시간 전에 옆 집에 '강아지'를 잠시 맡겨두고 아이가 잠이 들자마자 산타의 선물을 집으로 들이면 1차는 성공이다. 다음은 내일 아침 아이가 깨기 전에 크리스마스트리 밑에 산타의 선물을 놓아두면 된다. '진순이'는 그렇게 엄청나게 복잡한 경로를 통해 드디어 우리 집 식구가 되었다. 



문제는 내가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를 임신하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 동물이라면 질색을 하셨던 양가 부모님들의 질타도 이어졌다. 게다가 우리 진순이는 무척 활발한 시츄여서 가만히 있지 못했다. 당시 나는 동네에서 과외를 하고 있었는데, 수업하는 동안 진순이는 방문에 설치한 안전문을 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수업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심지어 무섭다고 울며 돌아가는 아이들도 생겼다. 



진순이는 더 이상 우리 집에 있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수도 있었을 텐데, 견주인 나는 결국 다른 집에 진순이를 보내기로 결정을 하고 말았다. 진순이는 아이들을 위해 강아지를 구하고 있다는 지인의 지인에게 가게 됐다. 그 후로 나는 둘째를 낳고 과외도 무탈하게 하며 무심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가끔 진순이가 생각나기는 했지만 부러 진순이의 소식을 묻지 않았다. 



진순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게 된 것은 그 후로도 꽤 시간이 지나서였다. 진순이를 데려간 지인의 지인은 너무나 활발했던 진순이를 견디지 못하고 시골 어머님 댁으로 보냈고 그곳에서 죽었다고 했다. 왜 죽었는지는 알 수도 알 방법도 없었다. 차마 큰 아이에게 진순이의 죽음을 말할 수 없었다. 큰 아이에게 진순이는 선물이 아니라 친구였기 때문이다. 






다시는 동물을 키우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책임을 지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둘째였다. 둘째는 애완동물을 너무 키우고 싶어 했다(그 나이에 아이들은 당연히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어 한다. 우리 아이만 특별하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땐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에게 엄마가 강아지를 키우다 다른 집에 보내서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할 자신이 없었다. 첫째가 산타 할아버지와 동심이었다면, 둘째는 매일 주문처럼 애완동물 이야기를 하는 심리전이었다. 



토토는 그렇게 우리 집에 왔다. 토토는 태어난 지 두 달밖에 안 된 러시안 블루 아기 고양이였다. 내가 수업하는 동안 내 다리 위에서 잠을 잘 정도로 사람을 좋아했다. 사건은 토토가 성묘가 되어 더 이상 내 다리 위에서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크면서 벌어졌다. 온 집을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는 토토를 보고 공부를 하러 온 한 여학생이 작은 비명을 질렀다. 까만 고양이가 소리도 없이 책상 밑으로 와서 학생의 다리를 쓱 비비고 지나가서였다. 그 학생은 동물을, 특히 고양이를 무서워했던 모양이다. 



그 후 학생의 어머니는 내게 전화를 했고 아이가 고양이 때문에 무서워서 공부하러 못 가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알레르기 비염이 있다는 또 다른 학생 어머니에게 전화를 받고 나서 더 이상 토토를 방에 들여놓을 수 없었다. 수업을 하는 시간은 토토를 베란다로 옮겨 놓았다. 더운 계절에 문을 닫아 놓고 일을 할 수도 없었고 작은 아이가 어려서 오랜 시간 문을 닫고 있을 수도 없었다. 방문에 안전문을 설치했지만 토토는 안전문 밖에서 하염없이 '야옹'을 외쳤다. 



토토는 베란다 생활에 힘들어했다.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는데 통유리로 막힌 건너편에서 오랜 시간 혼자 있어야 했으니 말이다. 토토는 그 스트레스를 물건들을 뜯고 해코지하는 것으로 풀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혼자 있어도 집 물건을 건드리거나 하지 않는 아이였다.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화초를 헤집어 놓고 물건들을 뜯어 놓기 시작했다. 혼내는 것도 소용이 없었다. 토토는 점점 더 강렬하게 자신의 스트레스를 표현했다. 



같은 러시안 블루 고양이를 키웠던 친구는 그동안의 사정을 듣더니 자신에게 보내라고 했다. 같은 종이고 자신은 동물을 좋아하니 한 마리 더 키워도 상관없다고. 이번에는 모르는 사람이 아니고 친한 친구여서 마음을 놓았다. 또다시 책임을 지지 못하고 다른 곳에 보내야 한다는 사실은 절망적이었다. 



나는 일과 토토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조화롭게 해결해야 할지 방법을 찾지 못했다. 큰 아이는 뭐하러 또 고양이를 키워서 그러냐며 엄마인 나를 책망했다. 둘째 아이는 어떤 설명도 필요 없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데려오자고 겨우겨우 달랠 수밖에 없었다.  










토토는 어떻게 되었을까? 

토토 역시 진순이와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토토를 데려간 친구는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와 같은 종이어서 서로 잘 지낼 거라 생각했단다. 그런데 이번에는 토토 때문에 친구의 고양이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포악해져서 토토를 공격한다는 거였다. 친구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농장을 하시는 지인의 집에 토토를 보내겠다고 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을까. 친구는 토토가 병원에 있다고 연락을 했다. 항문이 막혀 썩어가고 있다는 거였다. 수술을 해도 크게 가망이 없다는 소식과 함께. 



토토의 죽음은 정확하게 5년이 지나서 아이들에게 고해성사하듯 털어놓았다. 머리가 영글대로 영근 아이들의 말은 구체적이고 날카로웠다. 

-예쁘다고 무조건 동물을 키우면 안 돼.

-어린아이가 조른다고 책임도 못 질 일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을 하느냐.

-책임을 졌으면 아이들이 죽었겠느냐.



집사로도 견주로도 실패를 하고서야 '책임'이란 두 글자의 무게를 알게 됐다. 

두 생명의 죽음만큼이나 무거운 '책임'의 의미는 순간순간 가슴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세상의 많은 실패 가운데 이 실패는 하지 말았어야 하는 실패였다. 어쩌면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보내지 않았다면 아이들은 죽지 않았을까?

-혹시 다른 방법은 없었던 걸까?



마음의 생채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 집에는 다시 고양이 '찰스'가 식구가 되었다. 찰스가 우리 집 식구가 되기 전 나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당연한 일이 아닐까? 

"진순이와 토토를 잊은 거야? 엄마는 절대 못 키워."

하지만 아이들은 고양이 '찰스'의 입양을 결정했다. 



찰스가 처음 집에 오던 날을 기억한다. 

나를 경계하며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찰스는 그렇게 일주일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기 때문에 변한 영역에 적응하기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2년이 되어가지만 찰스는 여전히 곁을 내주지 않는다. 나 역시 찰스와 일정한 거리 이상을 넘어서지 않는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집사가 되어 찰스를 돌보겠다고 했지만 나는 애당초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대신 진순이와 토토가 다시 내게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했다. 

- 이번에는 잘해보라고.

- 나이만큼 현명해졌는지 한번 지켜보겠다고.

- 이 아이를 책임지면 그땐 용서해 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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