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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정 Sep 26. 2022

기사 한 줄 쓰기가 이렇게 힘든 일이었어!

첫 직장에서 실패하다

"저 사람 누구야? 헐"

"누군데 그래?"

"나 잡지사 다닐 때 내 사수."

"그래? 유명한 사람이네?"



첫사랑도 아니고 첫 직장에 첫 사수였다. 그 사람을 만난 건 당시 유명한 앵커가 진행하는 아침 라디오에서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 사수의 이름 석 자와 목소리는 이십 년이 지났는데도 선명하게 기억 속에 박혀 있었다. 그 사람은 아주 유명한 정치 평론가가 되어 있었다. 이십 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그 목소리는 순식간에 내 기억을 20년 전으로 돌려놓았다. 



- 숙정 씨는 이곳에 잘 맞을 것 같은데 이곳에 입사원서를 한번 넣어 보겠어요?

당시 나는 기독교방송 문화센터에서 기자 과정을 이수하고 있었다. 그 과정을 담당했던 강사는 내게 운명처럼  '그곳'을 제안했다. 스물세 살 호기 어린 학생이 '선생님'을 쫓아다니며 질문하는 모습이 그 잡지사의 성향과 맞을 거라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물론 나는 당당하게 '그곳'에 입사를 했다. '선생님'의 입김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나중에 오랜 시간이 지나 문화센터 강사 선생님과 잡지사 선배의 정치적 행보를 보았을 때 이들은 알고 있었을 확률이 높았다. '선생님'의 추천이라면 일 시켜볼 만하다 판단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것도 아니면 내가 뽑지 않으면 안 될 인재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말이다. 



그렇게 당당히(?) 언론사에 취직을 했다. 

기자가 꿈은 아니었지만 내 꿈과 유사직종이었고 나는 '글 쓰는' 행위에는 자신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데스크(신문사나 잡지사의 편집장을 데스크라고 부른다. 주로 책상에서 이런저런 지시를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지 싶다)는 6개월 수습기간 동안 내게 일을 가르쳐 줄 사수로 그 선배를 붙여줬다. 덥수룩한 수염에 뿔테 안경을 썼는데 안경 너머 부리부리한 눈으로 레이저도 쏠 기세였다. 어쨌거나 무척 강한 인상의 선배는 친절이나 자상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매일 아침 출근을 하면 수습들은 청소를 했다. 신문들을 가지런히 정리해서 데스크의 자리와 회의장에 놓아두면 두 번째 일이 끝난다. 9시가 가까워지면 선배들도 하나둘씩 출근을 마무리한다. 월간지는 월 초 편집회의가 있다. 수습은 한구석에 쭈그러져 있어야 한다. 편집회의에서 기획기사며 주요 기사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아직 분위기 파악도 안 되는 나는 무슨 말인지 절반은 알아듣고 절반은 외국어와 비슷한 빠르기로 알아듣지 못하기 일쑤였다. 다행스러운 것은 나에게 뭘 쓰라고 하지 않는다는 거다. 처음 한 달은 뭔가를 쓴 기억이 없다. 대신 뭘 읽으라는 지시가 있을 뿐이다.



편집회의가 끝나면 선배들은 각자 자기 갈 길을 간다. 월간지여서인지 여자 선배가 많았다. 이 잡지사에서만 꽤 오랜 시간 기자 생활을 하고 있던 선배 A는 당시 임신 중이었다. 베테랑 기자여서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있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늦게 사무실을 나오는 날도 많고 아예 사무실을 나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풍채만큼 넓은 마음을 가졌던 선배 A는 구박받는 내게 잘해 주었다. A가 사무실에 오지 않는 날은 든든한 지원군 한 사람을 잃은 느낌이 들었다. 



선배 B는 잡지사의 사진기자였다. 내게 사진기자의 환상을 단번에 심어준 여성이다. 예쁘고 스타일리시했던 B는 성격마저 털털했다. 선배 B가 사무실에 나왔다가 카메라를 무심하게 어깨에 메고 나갈 때면 내 가슴이 설렐 지경이었다. 아쉽지만 나는 선배 B와 이야기할 일이 없었다. 선배 역시 연습용 기사만 쓰고 있는 내가 관심 밖이었을 것이다. 



선배 C는 소박한 얼굴에 가장 인간성이 넘치는 선배였다.  역시 베테랑 기자라 늘 심층취재 기사를 썼는데 회의라고 할 것이 별로 없이 늘 취재가 정해져 있는 느낌이었다. 데스크는 그 선배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선배 C는 나를 안쓰럽게 챙겨주는 또 다른 선배이기도 했다. 이 외에도 선배 D와 선배 E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의 관계들이었다. 어쨌거나 사수는 싫으나 좋으나 당시로는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하고 있는 불편한 갑을관계였다. 



"이거 다시 써와."

"이건 아닌데. 다시 써서 가져와."

그럴 때면 고작 대여섯 문장 사이로 빨간 볼펜이 춤을 췄다. 익숙한 교정 기호들이 내가 쓴 문장들을 헤집어 놓곤 했다. 받아 든 기사를 보며 데스크와 사수가 던진 암호를 해독해야 하는 날들이 쌓여갔다. 

도대체 뭘 고치라는 걸까?



신입에게는 누가 따로 퇴근을 알려주지 않는다. 더군다나 월간지 편집실에는 퇴근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 자신이 취재할 일정을 소화하면 집에 가는 것이고 할 일이 있으면 회사로 들어오는 것이 일반적인 잡지사의 생태를 사수조차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연차가 쌓이면 눈치껏 하겠지만 1년이 가까워 오도록 나는 몇 개의 단신과 짧은 취재 기사를 쓰고 있을 뿐이었다. 서너 꼭지의 기회 기사를 쓰는 선배들이 하나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도 나는 수정할 기사와 눈싸움을 하고 있어야 했다. 회사에 있는 시간보다 회사 밖을 나가는 시간이 그렇게 행복한 일인지도 그때 알았다. 



나도 지원군이 있고 응원군이 있었다. 

잡지사를 함께 들어간 친구가 있었던 거다. 나는 편집부 기자로 그 친구는 편집부 디자이너로 입사했다. 당시는 매킨토시로 잡지를 편집했는데 친구는 유일한 편집부 디자이너였다. 그러니까 말이 신입이지 실세나 다름없는 존재라고 할까. 데스크는 필요한 것을 요청하거나 할 뿐 디자인은 그 친구의 고유 권한이었다. 디자이너실이 따로 있지 않고 편집실 한 곳에 있다 보니 친구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실시간 중계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였는지 친구는 나의 진한 술친구가 돼주었다. 



나의 응원군은 다른 곳에도 있었다. 2층이 편집실이고 1층에는 총무팀이 있었는데 이 총무팀에는 이십 대 또래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는 금세 한패가 됐다. 2층 나와 친구, 1층 총무팀 세 명은 틈만 나면 우리만의 회동을 가졌다. 주로 나의 고난사가 안줏거리였지만 그들은 나의 든든한 응원군이었다. 내가 그 척박한 곳에서 2년 가까이를 견뎠던 것은 그들이 있어서였다. 우리는 늘 독립문에서 종로까지 훑어가며 술을 마시고는 건대 근처 친구의 자취방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문제는 편집실을 들어서는 순간 열등감과 자괴감이 어깨 위로 '쿵' 내려앉는다는 거였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자꾸 실수를 하게 된다. 고치라는 문장을 더 엉뚱하게 고치고 수정하라는 글자를 건너뛰기도 한다. 사람이 열등감에 압도당하면 상대방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 늘 내 눈은 내 신발 앞코를 향해 있었다. 사람이 자괴감에 빠지는 순간, 시야는 좁아지고 사고가 정지된다. 나는 사수와 데스크의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첫 직장은 첫 퇴사로 끝이 났다. 

입사 원서를 처음 쓴 직장에 사직서도 처음 쓰게 됐다. 꿈이었다면 꿈이었던 기자 생활을 내 손으로 그만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견뎌서 내가 당신들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싶기도 했다. 낮에는 깨지고 밤에는 친구들의 위로로 치덕치덕 상처를 때우면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보다 더 큰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마음은 이겨내라고 하는데 몸은 늘 움츠러들고 기사는 쓰면 쓸수록 미궁으로 빠져들기만 했다. 지적받을 것을 피해서 쓰다 보니 나조차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글이 되어 버렸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은 내가 더 이상 이곳에서 버틸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표를 내던 날 사수는 말했다.



"잘 그만두는 거야. 너는 이 일에 재능이 없어. 빨리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것이 너한테 좋아."

마지막까지 돌아온 사수의 냉철한 말은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히지도 않았다. 아프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홀가분하거나 속 시원하지도 않았다. 내가 너무나 하고 싶었던 일을 내가 절대 잘할 수 없다는 통보는 스물여섯 살에게 사형선고와 같았다. 



세상과 만난 첫 직장은 첫 실패로 끝났다. 회사를 다니는 내내, 내가 능력이 없다는 것을 타인을 통해 매일같이 확인받는 것은 생각보다 큰 고통이다. 잡지사를 나오고 나서 나는 글을 쓰지도 책을 읽지도 않았다. 내 능력 밖의 일에 욕심을 갖지 않겠다 결심까지 했으니까. 문제는 문제가 해결되어도 늘 문제를 던진다는 거다. 내가 가장 잘한다고 생각했던 일에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 이번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나의 쓰임새를 다시 찾아 나서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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