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되기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에게 프리랜서는 로망이기도 하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할 필요도 없고, 내 몸이 힘들면 쉬었다 일을 한다고 누가 눈치를 줄 사람도 없다. 어디로든 여행을 가고 싶다면 연차를 쓰거나 할 필요도 없다. 일이 손에 안 잡히면 툭툭 털고 산책을 나서도 아무 상관이 없다. 정말 꿈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프리랜서란 일정한 소속이 없이 자유계약으로 일을 하다 보니 생존에 필수적인 3대 보험인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에 자동 가입이 되지 않는다. 지역 의료보험과 국민연금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돈을 지불해야 들 수 있고 고용보험은 고용주의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들고 싶어도 들 수가 없다. 프리랜서란 신분은 대출을 받을 때도 무척 불리하게 작용한다.
일정 시간 출근의 필요가 없는 대신 딱히 퇴근 시간이 없다. 일을 못 끝내면 마감을 맞추기 위해 24시간 일을 하기도 한다. 내 마음대로 쉴 수도 있고 여행도 갈 수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경우는 두 가지다. 유명하거나 인지도가 있어서 내 마음대로 일을 조절할 수 있는 경우와 적게 일해도 많은 돈을 버는 경우다. 이 두 가지에 해당 사항이 없다면 시간이 있어도 쉴 수 없고 쉬어도 거의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직장을 다닌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엄두도 못 내는 것은 당연하고 회사에서 원하는 일을 해야 한다. 싫으나 좋으나 선택의 가능성이 별로 없다. 인간관계가 중요한 회사 생활에서 나 같은 내향인은 하루하루 살엄음판을 걷는 기분이 들 수도 있다. 그러니 프리랜서의 장점이 직장인의 단점이 되고 프리랜서의 단점이 직장인의 장점이 되는 삶의 오묘한 이치를 잘 받아들이고 살기로 한 지 오래다.
프리랜서이나 작업실이 따로 없는 무늬만 프리랜서인 나는 집에서 일을 한다. 그러니까 코로나 팬데믹 훨씬 이전부터 재택근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아이를 낳고 출근을 해보니 누군가 나 대신 아이를 돌봐줘야 했다. 그 누군가는 아이 셋을 다 키우고 살림과 육아에서 막 해방된 애꿎은 엄마가 되었다. 자신이 돈을 벌어 살고 싶어서 일을 시작하셨던 엄마는 다시 육아의 길로 들어서야 했다. 큰 아이는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할머니 손에서 성장했다. 엄마는 그렇게 꼬박 6년을 나의 아이를 키워 주셨다.
둘째를 낳고 나니 더 이상 엄마에게 두 번째 손주를 키워달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출근을 하지 않고 집에서 일을 한다면 육아와 살림, 일을 동시에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프리랜서를 선택했다. 물론 육아와 살림, 일을 동시에 할 수 있을 거란 환상은 하루도 못 가고 깨졌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에 성공한 사람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20년 간 내 경험으로 보면 육아와 살림, 일을 동시에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려다 보니 또다시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다. 이번에는 둘째 아이와 9살 차이 나는 큰 아이였다. 큰 아이는 내가 일을 하는 시간에 동생을 봐주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홉 살 조금 지난 아이가 어린아이를 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돌봄 서비스를 신청하고 엄마에게 일주일에 삼일만 아이를 봐달라고 제안을 하는 등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니 아이를 키우고 일을 하는 여자가 소파에 앉아 책을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벼락 맞을 확률보다 가능성이 더 낮았다. 육아와 프리랜서 일을 씨줄 날줄로 이어보고 다이어리에 시간을 분단위로 쪼개어 기록을 해도 안된다. 늘 계획을 벗어난 변수들이 먹잇감을 찾아 밀림을 헤매는 맹수들처럼 종잡을 수 없는 곳에서 튀어나왔다.
친구와 대학로 데이트를 잡아 놓고 약속 당일 아침이 되면 아이가 아팠다. 오늘은 꼭 이 책을 읽어야 하는데 아이는 놀이터에서 놀자고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운 좋게 모임을 나가면 "엄마 언제 와"라는 간곡한 귀가 요청 전화가 알람처럼 울려 댄다. 서너 번 약속을 취소하다 신용 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아예 모임 참석을 포기했다. 나의 인간관계와 아이의 성장은 반비례 곡선을 그리며 시간이 흘렀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이 어린것들을 언제 다 키우지 싶었는데 정말 아이들이 컸다. 나의 기억은 십여 년을 훌쩍 뛰어넘어 시공간을 초월해 있었다. 아이들과 격투기급으로 보낸 시간들은 순삭이 되었다. 그 시간 동안 끊임없이 나를 들볶았던 상념들이 사라져 버렸다. 오로지 이제 '해방'되었다는 기쁨만 남았다. 이제 책을 볼 수 있다. 그것도 조용히. 아무도 나를 방해할 사람이 없다. 이제 맘껏 책을 읽고 내 일에 집중할 수 있다. 비로소 찐 프리랜서의 삶을 살 수 있다.
책을 들고 앉았다. 오늘은 책을 읽고 강의도 듣고 기사를 보내고 글을 몇 개 쓰면 된다. 책을 펼치고 포스트잇과 형광펜을 가지런히 책 옆으로 늘어놓았다. 시작이 좋다. 점점 책 속 세상으로 빠져 들어간다. 나는 마침내 책 속 세상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때,
"띠리 띠리 띠리리리리~~ 띠리리~~~띠리리"
맞다. 여기는 집이다. 사무실이 아니다. 카페도 아니다. 세탁기 알림음이다. 가서 세탁물을 뺄까? 그냥 나중에 일을 다 끝내고 뺄까? 아니다. 놔두면 빨래에서 쉰 냄새가 난다. 볕이 좋을 때 널어야 수건을 제대로 말릴 수 있다. 세수를 하고 잡아 든 수건에서 나는 쉰 냄새만큼 참을 수 없는 것은 없다. 책을 덮고 일어나 세탁기로 향한다. 빨래를 털고 손바닥으로 툭툭 치고 가지런히 놓으면 굳이 다림질을 하지 않아도 옷의 구김이 사라진다.
젖은 빨래의 마름질을 마치고 나니 싱크대에 담긴 그릇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 잠시 쉬었다 하겠노라고 설거지를 보류하고 있었다. 지금 하지 않으면 점심 먹고 설거지거리가 싱크대를 넘어설 기세다. 이제 몸은 반걸음 앞의 싱크대로 향한다. 옥수수 전분으로 만들었다는 수세미에 자연 유래 성분 세재를 묻힌다. 그것도 잔뜩. 거품 목욕을 해도 될 것 같은 풍성한 거품에 익숙하다 보니 친환경 세재의 인색한 거품은 설거지 시간을 길게 만들었다. 두 번 문지를 것을 열 번을 문질러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설거지 시간은 더 늘어났다. 그래도 환경을 생각하면 내 몸이 힘든 것이 낫지 싶기도 하다. 설거지가 끝나고 나니 점심을 먹을 시간이다. 지금 먹지 않으면 저녁 먹을 시간이 늦어진다. 이제 책상 위에 뒤집어 놓은 책과 열어 놓은 노트북의 존재는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에 밀려 방치되고 있다. 조금 전까지 독서와 글쓰기는 나에게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었는데 말이다. 괜찮다. 나는 프리랜서다. 언제든 일을 쉴 수 있고 하고 싶을 때 일을 할 수 있는 프리랜서. 그러니 괜찮은 거 맞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