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예고에 갔다. 나는 예고를 보내면 살벌한 고등학교 시절을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덜 불행하게 보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순전히 나의 생각이었다.
아이는 60명의 경쟁자에 둘러싸여 매일 울며 학교를 다녔다. 아무리 해도 자신만큼, 아니 그 이상 잘하는 아이들 틈에서 더 잘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자퇴를 하고 싶다고 우는 날이 절반이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어찌어찌 2년의 시간이 지났고 대학입시를 보게 됐다.
수시 원서를 5군데에 넣었다. 높은 곳 1군데, 적정한 곳 2군데, 합격 가능하다 여겨지는 곳 2군데를 넣었다. 한때 원하는 대학에 원하는 만큼 원서를 쓸 수 있을 때는 원서비만 백만 원이 넘게 나온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떠돌기도 했다. 그렇게 원하는 곳에 마음껏(?) 원서를 쓰게 하니 대학들은 원서비로 엄청난 이득을 취하고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그 비용을 다 부담해야 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결국 수시 원서를 5군데에만 쓰도록 바뀌었다.
시험 한 번에 10년 공부 인생이 결정되는 불합리함에 비하면, 기회가 5번으로 늘어났고, 수시가 안되면 정시에 다시 도전을 할 수 있으니 일면 합리적이다. 하지만 달리 보면 한 번 실패의 아픔을 겪을 것을 다섯 번, 아니 그 이상 실패의 아픔을 겪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처럼 실패가 경험으로 인식되지 않는 경우는 실패 후폭풍을 아이들이 견뎌내는 것이 만만치 않다. 그리고 그 실패는 결국 큰 아이의 이야기가 됐다.
큰 아이는 수시 원서를 넣은 다섯 군데에서, 10번 안쪽으로 예비 번호를 받은 두 곳을 빼고 모두 불합격했다. 예비번호란 것도 앞에 학생들이 모두 입학을 포기해야 순번이 오는 복불복 게임과 같다. 예비번호 10번을 넘어서도 합격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큰 아이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결국 큰 아이는 5번의 실패를 두 달만에 하게 됐다.
솔직히 엄마인 나는 무덤덤했다. 이상하리만치 나는 괜찮았다.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거나 하지 않았고 머리를 꽁꽁 싸매고 드러눕거나 그런 일도 없었다. 이미 십 년 넘게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때였다. 대학은 1등부터 순서대로 가는 것이 아니란 것을 몸으로 겪고 있었고 대학에 떨어진 것은 실력이 부족해서이지 큰 아이가 잘못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대학입시 실패는 길가다 돌부리에 걸리는 수준이란 것을 깨닫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아이에게 5번 결과를 물어봤고 아이는 5번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결과를 물어보는 나보다 결과를 답해야 하는 아이를 보는 것이 더 걱정이었다.
"시험 보느라 고생했어. 이제 좀 쉬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천천히 생각해 보자. 대학 떨어졌다고 어떻게 되지 않아." 내 머릿속을 뒤져 감정을 빼고 가장 담담한 말들을 꺼내어 아이에게 했다.
아이는 수시 5번의 실패 후에도 정시에서도 떨어졌다. 10월부터 2월까지 상상 이상의 실패를 몰아서 했다. 엄마는 우리 손주 속상해서 어떻게 하냐고 우셨고, 아이도 떨어지는 매 순간 울었다. 울지 않는 것은 나 혼자였다. 그게 그렇게 울 일인가 싶기도 했다.
아이는 생각보다 빨리 일상으로 돌아왔다. 재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들고 왔다. 자신은 4년제 미술대학을 가지 않고 예술대학을 가겠다는 거였다. 그 학교의 입시가 일반 학교와 달라서 그 학교 입시만 준비하는 학원을 다녀야 한다는 거였다. 문제는 그 학교를 떨어지면 다른 학교를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는 거다. 예체능은 대부분 학교마다 준비해야 하는 것이 달라서 A학교 입시에 맞춰 준비를 하면 B나 C를 시험 보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 제안은 내가 전혀 생각하지 않은 방향이었다. 또다시 복불복 게임을 할 수는 없어서 아이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만약 그 학교에 안되면 너는 다시 삼수를 할 수도 있다는 것과 그것은 굉장히 시간 낭비가 될 수 있다고. 설득? 그런 것은 안된다. 내가 키웠으니 설득 안 되는 아이를 설득시킬 방법이 없었다. 아이의 계획은 구체적이었고 재수를 시켜주면 생활비는 알바를 해서 벌어 쓰겠다고 했다.
아이의 재수는 그렇게 본인 뜻대로 시작됐다. 언젠가 지인 모임에서 한 선배가 내게 물었다.
"애들은 잘 크고? 대학 갈 때 되지 않았나?"
"재수해요."
"아이고, 미안해라."
"뭐가 미안해요. 재수하는데"
"고생이 많겠다"
"하하, 제가 고생할게 뭐가 있어요. 재수는 제가 하는 게 아닌데요."
답을 찾지 못해 당황해하던 선배 얼굴이 떠오른다. 답변의 의도와 상관없이 상대를 당황시켰을 답변이었다.
큰 아이는 이제 스물여덟이다. 언제 이렇게 컸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내 아이의 성장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이 아이를 언제 키우나'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래서이다. 가까이서 보니 내 아이의 성장은 늘 더디게 느껴진다. 친구 아이가 대학생이 되었다고 하면 그제야 내 아이도 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가 크고 나니 아이가 성장하며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아마 사흘 밤낮을 이야기하라고 해도 지치지 않고 아이의 성장 이야기를 할 수 있다. 53년 내 인생만 돌아봐도 수없는 실패와 좌절이 먼저 떠오른다. 그것은 53년어치의 실패와 좌절이다. 28년을 산 아이는 어떨까? 아이도 마찬가지일 거다. 아이에게는 28년이 자신이 살아온 인생 전체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수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다.
아이는 내가 아니기에 내 실패와 아픔을 모두 알 수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이가 아니기에 아이의 실패와 아픔을 모두 알 수 없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 아이 인생의 아주 작은 부분이다. 내가 기억하는 아이의 실패 중 대학입시가 떠오른 건 다시 둘째 아이의 입시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나는 아이가 대학입시에 실패한 것을 타박하거나 혼내거나 울며 머리 싸매고 드러눕지 않은 나를 마음속으로 칭찬했다. 나는 누구보다 쿨하고 속이 깊은 엄마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게 진짜 아이에게 위로와 용기가 되었을까를 생각하게 됐다. 그것 역시 내가 받고 싶은 위로를 아무도 해주지 않아서였다. 아이는 실패한 입시보다 실패한 자신의 속상한 마음을 누군가 알아봐 주길 원하지 않았을까?
'괜찮아, 대학 떨어졌다고 죽지 않아. 다시 준비해보자' 같은 말은 위로가 아니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누가 나에게 '이거 실패했다고 너 죽지 않아. 다시 힘 내보자'라고 한다면 나는 위로가 될까? 그렇지 않다. 힘들어 죽겠는데 '힘내자'란 말은 폭력에 가깝다. 왜 그때는 "우리 딸, 속상해서 어쩌니." 그 한마디를 해주지 못했을까?
위로의 말을 못 찾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다른 사람이 다 그렇게 얘기해도 엄마는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되잖아. 엄마는 나를 믿어줘야 하잖아."
지금도 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직도 위로에 초보다. 내가 듣고 싶은 위로를 하면 되는데 자꾸 내가 하고 싶은 위로를 하고 있다. 진짜 위로는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면 되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