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숙정 Jun 04. 2021

지금 공연 보러갑니다

프롤로그

"어디가?"

"어, 공연 보러 가."

"우와, 좋겠다. 공연도 보러 다니고."

정작 나를 부러워했던 그 사람은 내가 공연을 보러 가는 만큼 여행을 다니는 사람이었다. 정말 내가 부러워서가 아니라 인사치레였겠지만 공연을 보러 간다고 하면 의례 이런 반응이 온다. 


공연은 영화처럼 접근성이 좋지도 가격이 저렴하지도 않다. 시간을 내어 공연장을 가야 하고 가격도 영화에 비하면 만만치 않다. 영화처럼 시간이 지나면 다운을 받아 다시 보기를 할 수도 없다. 무조건 그날 그 시간에 그곳으로 가야 한다. 한번 보고 또 보고 싶으면 그만큼의 돈을 다시 지불하고 봐야 하는 것이 공연이다. 선택하기는 또 얼마나 까다로운가. 


공연장에서는 팝콘이나 음료수를 먹을 수 없고 옆사람과 대화는 절대 할 수 없다. 공연장은 음악회, 연극, 뮤지컬 모두 온전히 두 시간 여를 앞만 봐야 한다. 그러니 정말 공연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두 시간 앉아 있는 것은 고역일 수 있다. 여전히 공연 관람은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이나 즐기는 영역으로 인식되는 모양이다. 나 역시 그런 일반적인 생각과 거리가 멀지 않았으니까. 


우연히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을 공연장에서 듣게 된 후로 나는 오전 시간에 공연되는 '브런치 콘서트'를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를 유치원과 학교에 보내고 공연장으로 달려갔다. 차 한 잔, 식사 한 번 못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행복했다. 슈베르트와 쇼팽도 구분할 줄 모르면서도 생전 처음 듣는 바이올린, 비올라 소리에 마음을 뺏겼다. 음악회를 보고 나니 이제 미술관이 궁금해졌다. 


"어디가?"

"응, 미술관가."

"우와 아아, 미술관? 그런 데도 가? 너무 좋겠다."

무엇이 좋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감탄사의 길이가 더 길어졌다. 그런데 솔직히 미술관은 공연장보다 더 넘사벽이었다. 음악도 모르지만 그림은 더더욱 무지했다. 그래도 고전 미술은 교과서에서 본 희뿌연 기억을 더듬어 볼 수 있었다. 현대미술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림 이해는 둘째치고 설치미술 작품은 어디를 봐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여기에 사진전은 내게 더 큰 난관이었다. 


모르는 것을 머리 싸매며까지 왜 보러 다녔을까? 그건 마음과 몸과 물질로 힘들었던 결혼생활에서 내가 찾은 탈출구였기 때문이다. 그러자고 작정해서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온 신경을 다른 곳에 쏟고 오면 나머지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음악회, 미술관 투어는 대학로로 이어졌다. 연극을 보는 눈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하자 연출가가 누구인지가 눈에 들어왔다. 마음에 드는 공연 연출가가 다른 작품 연출을 맡으면 그 공연을 보러 갔다. 한 배우의 연기가 마음에 들면 그 배우가 나오는 다른 공연을 보러 갔다. 내가 본 모든 것들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리뷰가 됐다.


무엇이건 오랜 시간 하다 보면 몰랐던 것을 알게 되고 노하우도 생기기 마련이다. 먼저 공연 관람이 꼭 큰돈이 드는 것은 아니다. 처음으로 본 금난새 선생님의 '브런치 콘서트'는 창동 천막극장에서 매달 열렸다. 당시 티켓은 만원이 되지 않았다. 현재도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공연되고 있는 국립극장의 '정오의 음악회'는 시즌권을 끊으면 회당 만원 정도이다. 시립미술관이나 국립현대미술관 등은 관람료가 없는 전시가 대부분이다. 큰 전시도 미리 선구매를 하면 할인된 가격으로 살 수 있다. 카드사나 공연 예매 플랫폼에서 이벤트나 행사로 할인을 하는 경우도 많다. 


연극이나 뮤지컬은 그보다 스케일이 크다. 하지만 국립극단이나 두산아트센터 등은 무료 기획공연이 많다. 티켓팅이 하늘에 별따기여서 그렇지 관심을 갖고 정보를 찾으면 우수한 공연을 보는 행운을 잡을 수 있다. 특히 청소년들은 할인이 절반 가까이 되는 곳이 대부분이다. 일곱 살 때부터 나와 공연을 보러 다닌 둘째 아이는 학원 대신에 공연 관람을 했다. 교육철학이 있어서 한 것은 아니지만 공연 관람은 어느 학원보다 아이에게 양질의 교육기회가 됐다. 물론 당시는 공연 보는 돈이 만만치 않아서 "너 학원 가는 대신에 엄마랑 공연 보러 가자"며 시작한 것이었다. 아이는 어린 시절의 경험을 여전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으며 지금은 소설을 쓰는 공부에 여념이 없다. 


백방으로 정보를 뒤지고 해도 규모가 큰 뮤지컬 공연은 금액이 크다. 한 번은 어찌 본다고 해도 가정 살림에 들어가는 돈도 만만찮은데 공연 관람료를 생활비에서 빼는 것은 어렵다.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있었지만 나는 공연을 보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따로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동네 친한 동생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 "난 언니가 공연을 그렇게 보러 다니길래 언니 엄청 부자인 줄 알았어요" 


지금은 공연을 보기 위해 돈을 쓰지는 않는다. 리뷰를 쓰는 것이 일이 되니 그런 장점이 생겼다. 시간이 흘렀어도 변하지 않은 것은 '공연을 보는 동안 느끼는 행복'이다. 연극은 같은 이야기도 연출가의 시선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한 연출가의 작품이어도 그날 그 배우의 감정에 따라 또 다르게 해석된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을 보는 즐거움은 뭐라 말을 할 수가 없다. 그 속에서 만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언제부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희망적일 수도, 비관적일 수도, 그저 그런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작가의 이전글 중년 1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