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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정 Jun 15. 2021

버스카드

내리실 때 찍지 않으시면 추가요금을 내실 수 있습니다!!

큰 아이가 중학생이 된 어느 날이었다. 아이는 미술을 공부하러 시내로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미술학원을 다닌 것이 초등학교 6학년부터였으니 2년째 버스를 타고 학원을 다니던 터였다. 그날도 아이는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왔다. 학원을 별반 다지지 않았던 아이라 매일같이 네댓 시간을 그림 그리고 늦은 저녁 집으로 오는 아이가 안쓰럽기만 했다. 아이는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내게 왔다. 바닥에 철퍼덕 앉더니 느닷없이 울기 시작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난 몰라. 엉엉"

"아니, 무슨 일이냐니까? 누가 따라왔어? 무슨 일 있었어? 아니, 혼났어? 뭐야, 도대체 왜 그러는데?"

놀라 추궁하는 내 앞에서 아이는 한참을 울었다. 그것도 아주 서럽게.


"엄마, 버스 내릴 때 버스카드 찍어야 되는 거야?"

"그럼, 안 그러면 돈이 많이 나가지. 왜?"

"난 여태까지 몰랐어. 한 번도 안 찍었어. 근데 찍고 내리는 거래."

"......................."

"왜 그거 안 가르쳐줬어?"


순간 나는 얼음이 됐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이는 또 울었다. 내가 버스카드를 내릴 때 찍고 내리는 것을 안 가르쳐줘서 속상해서 우는 건지, 아니면 그런 것도 모르고 일 년이 넘게 그냥 내렸던 자신이 바보 같아서 우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날의 해프닝은 그렇게 하루를 넘기고 끝이 났다. 





시간이 흘렀다. 큰 아이가 대학을 졸업할 학년이 되었을 즈음이었다. 한참 성폭력에 관한 기사로 세상이 떠들썩하던 때였다.

"도대체 미친 거 아니야?"

"내 말이, 정말 남자들 혐오스럽단 생각이 들 정도라니까?"

두 여자가 앉아서 핏대를 높이고 허공에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엄마, 나 중학교 들어가서 남자애들한테 전따 당한 거 모르지?"

"뭐? 왜? 어떤 놈들이 그래? 왜 얘기 안 했어?"

역시 전혀 이성적이지 못한 나는 놀라 벌떡 일어섰다.

"내가 중학교 들어가서 막 이상하게 화장하고 옷 입고 다니고 그랬잖아."

"알지, 알지"

"처음 학교 가서 앞에 발표하러 나가는데 남자애들이 와! 못생겼다 와! 쟤 봐 그러는 거야."

"뭐? 어떤 XXX들이 그랬는데?"

"남자애들이 전부 다. 그 후로 나 지나갈 때마다 못생겼다 웃기다 그랬어. 그래서 그때 내가 화장하고 치마 줄이고 그랬던 거야."

"나는 네가 이상하게 화장하고 옷도 이상하게 줄이고 그러고 다니니까, 생전 안 그러던 얘가 그러니까 네가 반항하는 줄 알았지."

"엄마가 그런 거 안 가르쳐 줬잖아. 내가 할 줄 모르니까 이상하게 하고 다닌 거 같아."


나는 다시 할 말을 잃었다. 이젠 내가 울고 싶어 졌다. 아이가 왕따를 당하고 힘들어했다는 것을 몰랐던 나 자신에게 화가 났던 것인지, 정작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살았는지 한심스러워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둘 다였을 거다. 내가 아이에게 가르쳤어야 되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 살아가는 방법이었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그래서 혼자 서부 개척하듯 청춘의 황야를 걸어가는 너에게 고맙다는 마음 밖에는.


Photo by Soo


그런데 그때 내 딸 왕따시킨 X들 나한테 걸리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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