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숙정 Jun 22. 2021

나 이런 사람이야!

이제 엄마에서 퇴근합니다

"자, 이제 9시 이후는 엄마를 부르지 마. 엄마는 이제 일 끝냈어. 이제부터는 너희가 알아서 해."


이십여 년간 출근하는 일을 거의 해보지 않았다. 대부분 집에서 일을 하다 보니 집안 일과 내 일이 섞이는 것은 다반사다. 한창 일을 하다가도 아이가 오면 내다봐야 하고 간식을 챙겨줘야 한다. 내 밥은 못 챙겨도 아이들 밥은 챙겨 먹여야 한다. 물이라도 마시려고 거실을 나오면 어지렵혀진 거실이 눈에 들어온다. 두 눈 질끈 감다가도 못 참고 청소기를 밀게 된다.


이내 산처럼 쌓인 설거지통이 눈에 들어온다. 보고도 못 본 척 참아 보지만 아이들 저녁을 챙기려면 어쩔 수 없이 설거지를 해야 한다. 세탁기에서 빨래가 다 되었다는 신호음이 울려 댈 때면 갈등은 최고조에 이른다. 일을 마무리하고 널 것인가, 아니면 시간 지나면 냄새가 날 테니 지금 널고 일을 다시 시작할 것인가. 물론 후자가 승리하는 때가 더 많다. 


하루가 끝나면 나는 녹초가 된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분명 하루 종일 엉덩이 붙일 시간도 없이 일을 했다. 내 일을 했고 아이도 돌봤고 집안 일도 했다. 하지만 내 일은 끝이 나지 않았고 설거지통은 다시 가득 찼다. 거실은 여전히 어수선하고 빨래는 누군가 개 주기만을 목놓아 기다리고 있었다. 



도저히 안될 것 같았다. 이렇게 가다가는 내가 폭발해 버릴 게 분명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자마자 아이에게 선언했다. 

"9시 이후는 절대 엄마를 부르면 안 돼. 알겠지? 엄마 퇴근이야."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왜냐는 질문도 하지 않았다. 정말 아이는 9시 이후로 '엄마'를 부르지 않았다. 


엄마의 퇴근은 둘째 아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둘째는 학교에서 방과 후 수업으로 음식 만들기를 했다. 그게 재미있었던지 다음에는 빵 만들기도 하겠다는 거다. 나는 아이의 선택을 전적으로 지지했고 기꺼이 지원을 했다. 아이는 그렇게 2년간 꾸준하게 여러 가지 음식 만들기 수업을 이어갔다. 음식 만들기를 배우고 나니 아이는 피클을 만들고 빵을 만들어 먹을 수준이 되었다. 


이제 내 큰 그림이 모습을 드러낼 때가 된 것이다. 나는 나의 퇴근 시간을 앞당겼다. 아침을 챙겨주고 나면 나머지 식사는 각자 알아서 하는 거였다. 어차피 고기를 좋아하는 큰 아이와 빵 종류를 좋아하는 둘째, 밥을 좋아하는 나는 결코 중간지점을 찾을 수 없는 상태였다. 각자 좋아하는 음식을 각자 알아서 만들어 먹기로 하니 끼니때마다 고민이 사라졌다. 내 역할은 음식재료를 사다 놓는 것이 다였다. 


엄마는 요리를 잘 못하며 잘할 마음이 없다. 그것까지 할 시간이 없다.

엄마는 빨래를 해 줄 수는 있지만 각자 옷은 각자가 챙겨가야 한다. 너희 속옷 색깔과 모양까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엄마는 청소하는 사람이 아니다. 각자 방은 각자가 치워라. 

엄마도 일을 하는 사람이다. 일을 끝내면 쉴 자유가 있다. 

엄마는 너희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며 너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지만 너희가 엄마의 삶 전부는 아니다. 


나의 퇴근은 주말에도 이어졌다. 주말 한 끼의 식사를 차리고 나면 퇴근을 한다. 작년 공연 관람 동아리 모임에서 '나'에 대한 인터뷰를 해보자는 미션을 한 적이 있었다. 주변 가족이나 직장 동료, 친구 등 '나'를 어떻게 표현하는지가 궁금해서 정한 미션이었다. 그때 둘째 아이가 내 인터뷰에 응해줬다. 아이는 정말 거침없이 '나'를 표현해 줬다. 당황스럽기도 했고, 내가 나쁜 엄마였나 싶어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는 나를 정확하게 보고 있었고 그런 나를 좋아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 이런 시람이야!!



엄마는 요리를 잘 못해. 그렇다고 육아를 잘하는 것도 아니야. 
그렇다고 엄마로서 아니라는 말은 아니야. 또 엄마는 역지사지가 없어. 아니 그럴 마음이 없어. 하지만 자기 일을 할 때면 진짜 커리어우먼 같아. 엄마가 결혼을 안 했다면 자기 일을 하는 더 멋진 사람이 됐을 것 같아. 왜? 맞잖아?
작가의 이전글 엄마다전화해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