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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정 Nov 18. 2021

선택의 의미

갈림길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갈까 말까를 고민할 땐 가는 게 맞고
할까 말까를 고민할 땐 하는 게 맞다 




안 가서 후회하느니 가고, 후회하거나 빨리 포기하는 게 더 낫다. 안 하는 것보다  후회하는 게 역시 미련이 적다. 모든 일에 대입하기에 무리가 있을 수 있지만 결정해야 할 일의 크기가 큰 경우 부딪쳐보는 게 더 나았다. 



4년 전의 일이다. 우연히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한 강의가 눈에 들어왔다. '분노조절 지도사'란 다소 생소한 자격증 과정이었다. 이런 것도 있나 싶어 찾아보다 문득 저 강의를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무작정 찾아가 접수를 하고 돌아왔다. 강의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가뜩이나 '화'가 많아졌다고 느꼈던 때여서 나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잡고 배운 것을 나 자신에게 적용해 보는 재미가 있었다. 



강의가 중반을 넘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수강생: 저 질문이 있는데요. 저는 몸이 아픈 시부모님이 계시는데 제가 모시고 살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어요. 싫은데 또 자식 된 도리로 그러면 안되잖아요. 정말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 일만 생각하면 화도 나도 너무 괴로워요. 이렇게 경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 아닌가요?


강사: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은 없어요. 제가 보기엔 이미 부모님을 모시는 것으로 선택을 하신 것 같은데요?


수강생: 그건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부모님은 당연히 모셔야 하는 건데.....


강사: 당연히란 것은 없어요. 부모님을 모실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예요. 모시지 않는다고 선택하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되겠죠? 간병인을 둔다거나 케어가 가능한 곳에 모신다거나. 모신다고 선택을 하셨으면 그다음 방법을 결정하면 되는 거죠.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서 다 부모님 모시기를 선택하지는 않아요. 선택이 도덕적이냐 그렇지 않느냐를 묻는 게 아니니까요.


수강생은 강사의 말에 공감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문제이며, 자신은 많이 힘들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원래 문제 속에 갇혀 있으면 그 생각을 벗어 나오는 것은 쉽지 않다. 수강생과 강사의 논쟁은 그렇게 계속 이어졌다. 




두 가지 선택지를 쓴다.

각각의 선택지마다 그것을 선택했을 때 생기는 장점과 단점을 쓴다. 

두 단점 중 내가 더 감당할 수 있는 단점을 선택한다.

선택을 하고 나면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그게 그렇게 되려고 그랬던 것인지 강의를 듣고 한 달이 지났을 때 나는 이혼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쳤다. 이혼을 하지 않으면 몇 년간 가족의 생계를 내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큰 아이는 대학 공부도 마치지 못한 때라 아이의 학업도 문제였다. 무엇보다 집도 날려버린 상황에서 가정과 일과 시댁과 빚 모두를 짊어지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몇 년의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수 있겠지만 이미 이십 년이 넘도록 나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혼을 한다면 시댁과 빚이란 짐은 없어지지만 아이들을 온전히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된다. 받을 위자료도 없었고 상대는 줄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정신적인 고통에서 벗어 나올 수는 있었다. 두 가지 선택지를 앞에 놓고 내가 어떤 고통을 내가 더 이겨낼 수 있을지만 고민했다. 어차피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나는 선택에 따르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을 것이 뻔했다. 그럴 거라면 내 마음과 몸을 살리는 편이 더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즈음 큰 수술을 해서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몸과 정신이 살아야 아이들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선택은 오로지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 반영되어 있다. 모두가 같은 선택을 할 수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누구에게 이해를 구할 수도 없었고 누구에게 동의를 얻을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선택을 하고 나서 나는 비로소 살 것 같았다. 마음이 평온해졌고 더 이상 아이들에게 화를 내지 않게 되었다. 





잠시 같이 일을 했던 동료가 하루는 고민 상담을 요청했다

운동하는 아들은 둔 가장이기도 했던 동료는 내가 큰 아이를 미술 공부시켰던 것을 알고 있던 터라 조언을 구하고 싶다고 했다. 


동료: 우리 아이가 운동을 하잖아요. 근데 이게 돈과 시간이 참 많이 들어가요.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나: 맞아요. 우리나라에서 예체능 쪽으로 아이를 기르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걸 저도 알고는 있었는데 직접 해보니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저도 나중에는 빚지고 가르쳤어요. 대학 들어가서는 더 이상 힘들어서 이젠 네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손 들었어요.


동료: 저도 형편이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니에요. 야구는 전지훈련도 가야 하고 경기마다 데리고 다녀야 하고. 그래도 아이가 하고 싶다는데 부모가 돼서 안 해줄 수도 없잖아요.


나: 안 해줄 수도 있죠? 미술 하고 싶다고 모든 부모가 다 가르치지는 않더라고요. 안된다고 선을 긋는 분들도 많아요.


그 동료는 아이의 꿈이니 어떻게든 밀어주고 싶은데 이러다 자신은 먹고살 것도 안 남을 것 같다는 거였다. 자신의 인생은 없고 아이 인생만 있고 있다며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나: 진짜 힘들겠어요. 그럼 하지 마세요. 안 한다고 누가 뭐랄 사람도 없어요. 저는 선택을 하고 나면 후회하는 건 나만 괴롭고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요. 아이의 꿈을 지원하겠다고 선택했으면 어떻게 해나갈 건지 방법을 찾는 게 나와 아이를 위해서 맞다고 봐요. 또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하다가도 나중에 아이가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고 운동도 다른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구요. 경제적으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아무리 꿈이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하기로 맘먹으셨으니까 너무 아이만 보지 마시고 나를 조금씩 챙기는 것도 필요해요.




사실 그날의 이야기는 맥없이 끝이 났다. 

동료는 여전히 아이를 지원하고 주말이면 경기를 위해 지방을 돌고 온다고 했다. 생활비를 위해서 새벽에는 배달일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끝으로 더 이상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살면서 그 동료처럼 선택의 기로에서 방황하는 일은 너무 많다. 매번 선택을 하고도 이게 잘한 것인지, 잘 못한 것인지 또 고민을 하고 힘들어한다. 결국 어떤 선택을 하건 문제는 생기고 고통이 따른다. 그렇다면 내가 더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을 선택하는 게 맞다. 어려운 것은 마지막이다. 선택을 하고 나면 선택하지 않은 것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것. 그것으로 힘들어하고 갈등하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 선택이 신의 한 수가 되기도 한다. 슬프지만 머피의 법칙처럼 내가 선택한 것은 신의 한 수가 아닐 때가 많다. 아니 그렇게 느껴진다. 선택을 하면 그 길만을 보지 않고 다른 길을 자꾸 쳐다보며 생각한다. 저 길을 갔으면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하지 않을 텐데. 내가 저 길을 갔으면 훨씬 일이 잘 풀렸을 텐데. 하지만 막상 그 길을 갔어도 그 선택을 했어도 우리는 다른 길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선택이 힘든 것이 아니라 선택 이후 내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우리를 선택 앞에서 길을 잃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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