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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정 Jul 05. 2021

모두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어

내가 나일 수 있는 이유



엄마는 일기가 너무 성의 없고 빠진 날이 있다며
한 달치 일기가 적힌 일기장을 미련 없이 찢어 버리셨다.
그리고 방학 한 달치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모든 엄마들이 그렇듯 나의 엄마도 억척스러웠다. 살림살이부터 자식 교육까지 엄마처럼 살라고 하면 차라리 도망을 선택할 만큼 엄마의 삶은 억척 그 자체였다. 특히 자식 교육에서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셨다. 개학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엄마의 기습적인 방학 숙제 검사가 있었다.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가 1970년대는 명칭이 국민학교였다) 1학년부터 다져온 내공이 있었던 터라 방학 숙제 정도는 흠잡힐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기장이 딱 걸린 거였다. 엄마는 일기가 너무 성의 없고 빠진 날이 있다며 한 달치 일기가 적힌 일기장을 미련 없이 찢어 버리셨다. 그리고 방학 한 달치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엄마의 특훈(?) 덕분에 나의 글쓰기 실력은 해마다 부쩍부쩍 늘었다. 워낙 책 읽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고 글쓰기에 아주 젬뱅은 아니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학교 글짓기 대회마다 대표로 수상을 하는 일이 많았다. 자연보호 글짓기 대회. 반공 글짓기 대회. 과학글짓기 대회, 전국 학생 글짓기 대회까지 글과 관련된 상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어렴풋한 기억에도 내 어깨에 뽕이 꽤 높이 들어있던 시절이었다. 


학교에는 글짓기반 담당 선생님이 계셨는데 나를 많이 예뻐해 주셨다. 하루는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숙정아, 이번 글도 참 잘 썼네. 숙정아, 글은 굳이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쓰지 않아도 돼. 그냥 너의 생각을 써도 좋은 글이 된단다."

늘 아이들에게 친절하셨던 선생님은 그날도 나를 바라보시며 웃으셨다. 문제는 나였다. 

'다들 잘했다고 칭찬하는데 선생님이 왜 그렇게 말씀하시지? 내 글이 마음에 안 드셨나?'


섭섭하기도 했지만 뭔가 잘못을 들킨 기분이었다. 뒤통수가 따갑기도 했고 얼굴도 붉어졌다. 그 후로 선생님과 내가 어땠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선생님의 이야기는 늘 나를 따라다녔다. 내 자존감이 바닥을 드러낼 때도. 내가 일에 실패할 때도. 심지어 매 순간 문득문득 선생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글을 쓸 필요가 없다'



나는 선생님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걸 영악했다고 해야 할지, 똑똑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글을 쓰면 칭찬을 받는지 알 것 같았다. 그게 내 머릿속에는 훤히 보였다. 어떻게 시작을 하고 어떤 내용을 적고 어떻게 이야기를 끌어가면 어른들에게 칭찬을 받고 상을 받을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떤 대회에 낼 글이건 쓰는 게 힘들지 않았다. 선생님은 그걸 알고 계셨다. 선생님에게는 그런 내 생각이 눈에 다 보이셨던 거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민낯의 보여주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오랜만에 나간 동창회에서 잘 나가는 친구를 보면 움츠러든다. 내가 가진 모든 이력을 끌어모아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물 한 모금 삼키는 것도 불편할 때가 있다. 우등생 아이를 둔 같은 반 학부모를 만나면 '평범'한 내 아이의 모든 것이 하찮아 보인다. 나와 일면식도 없는 또래 여성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거나 성공한 인물로 검색어 상위에 오르면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나 자신이 초라해진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다. 그럼에도 내가 나로 힘내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선생님의 말이었다. 


선생님의 그 말은 순간순간 다른 의미로 변주되어 내 삶 속으로 파고들었다.

글을 쓸 때는 내가 누군가에게 멋지게 보이기 위해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람들을 만날 때면 내가 필요 이상으로 나를 포장해서 드러내는 것은 아닌지,

말을 할 때 내 생각을 꾸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뒤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너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살 필요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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