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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정 Aug 13. 2021

'엄마'라는 이름의 여자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노래 <봄날은 간다> 중에서--- 


 

엄마가 언제부터 이 노래를 좋아했는지는 모르지만 엄마의 18번은 이 노래였다.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쯤 노래가 다다를라치면 엄마는 늘 노래 끝을 흐리셔서 커서도 이 노래 제목이 <연분홍 치마>인 줄 알았더랬다. 노래 제목을 굳이 물어본 적이 없어서 '연분홍치마가 뭐야. 여자가 촌스럽게'라며 이름 모를 여자의 사랑노래가 어지간히도 청승맞다 생각했다.  




모든 것을 내어주고 한 세월을 살아 낸 여자의 색, 연분홍


연분홍이란 색이 주는 깊이를 안 것은 세월이 많이, 아주 많이 흐른 뒤 연극 속 한 할머니를 본 뒤부터였다. 연극 <3월의 눈>에서 연분홍치마를 입은 할머니 '이순'을 보는 순간 엄마의 노래 속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기울어 가는 한옥집 툇마루에는 장오와 이순 노부부가 겨우내 묵었던 문창호 지를 새로 바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수십 년을 함께 산 부부가 그러하듯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가도 할머니 잔소리와 할아버지 고집이 부딪치면 소란스럽지 않은 투닥거림이 이어지곤 했다. 장 오는 손자를 위해 마지막 남은 재산인 집을 팔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장오의 집을 산 주인은 이 집을 헐고 3층짜리 건물을 지을 계획이다. 오랜 시간 두 사람의 삶이 온전히 배어 있던 집은 문짝과 마루, 기둥까지 다 떼어가고 앙상한 모습만 남게 된다. 


자식에게 그리고 그 자식의 자식에게까지 모든 것을 내어주고 살아온 이순과 장오의 모습은 쓸만한 것이라고 문짝과 마루까지 뜯어가고 남은 집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남편보다 먼저 이승을 떠난 아내 이순은 장오의 상상과 기억 속에 되살아나 툇마루에 앉아 뜨개질을 한다. 자식들을 입히고 먹이고 가르치며 하루가 멀다 하고 닦아냈을 툇마루에 이순이 고운 연분홍 치마를 입고 앉아 있다. 연분홍은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한세월을 살아낸 여자에게 너무나 고운 색이란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연극 <3월의 눈>-배우 정영숙과 오영수의 커튼콜



세상 모든 엄마들의 삶은
그대로 역사이고 한 편의 문학작품이 된다. 


한풀이처럼 풀어놓는 엄마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가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하며 드라마 다음 편처럼 궁금함을 참지 못하곤 했다. 엄마는 기분이 좋은 날이면 신나서 이야기를 풀어 갔지만 어떤 날은 "그만하고 자. 됐다." 하시며 돌아 누워버리곤 하셨다. 


연극 <어머니>는 연출가 이윤택이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쓴 작품이다. 국민엄마인 배우 나문희에서 국민배우 손숙이 꾸준하게 이 배역을 해오셔서 그런가 연극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의, 혹은 우리들 어머니 이야기와 같아서 큰 울림을 준다. 이 작품 속 어머니는 요즘 세대가 느끼는 어머니 모습과는 다른 가장 전통적인 어머니상을 보여 준다. 


어머니는 글공부도 못했고 첫사랑과도 헤어져야 했다. 억지 결혼을 해야 했고 첫아기는 불륜 속에서 태어났다. 남편의 바람기로 평생을 속 썩이며 산 어머니는 일제강점기부터 전쟁과 분단이란 우리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냈다. 어머니란 이름이 떠올리기만 해도 먹먹해지는 이유는 어쩌면 이런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으로 버텨낸 한이 어머니의 삶과 등치 되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연극 <어머니>를 보고 있으면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라며 엄마를 채근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극이 끝날 때까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어머니의 삶을 지켜보게 되는 것은 관객 모두가 그런 어머니의 자식들이 때문이다. 아직도 기억에 선명한 것은 배우 손숙이 그려낸 어머니의 꼿꼿함과 단단함이다. 아무리 거센 시련이 와봐라. 내가 눈 하나 깜빡하나. 그런 비바람쯤은 수십 번도 더 이겨 낸 사람이야, 내가. 마치 그렇게 세상을 향해 이야기하는 듯했다. 세상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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