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는 유독 조손 가정이 많았다. 유진이네도 그랬다. 유진이 할머니는 일찍 아들과 며느리를 잃고 손녀를 혼자 힘으로 길러 낸 분이었다. 가정환경 조사서의 가족 사항란에는 보호자의 직업이 ‘의류업’으로 적혀 있었다. 나는 유진이의 우수한 학업성적과 단정한 외모로 보아 전통시장에서 한복점을 운영하는 우아한 어르신을 상상하며 할머니에 관해 물었다.
유진이는 할머니의 직업이 바짓단이나 옷소매를 줄이고 늘이는 옷 수선이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 반지하 월세방에서 입소문 타고 들어오는 일감으로 생활비를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좀 더 멋지게 포장하거나 애초에 숨기고 싶은 가정사를 거침없이 말하는 유진이의 모습에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웠다.
그해 졸업시기를 앞두고 D금융회사로부터 입사 추천서가 날아왔다. 면접에서 가정환경을 중요시한다는 내용이 붙어 있었다. 돈을 다루는 직업이므로 어려운 형편에서 자란 사람은 금융 사고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학교 성적으로 보나 생활 태도로 보나 유진이를 추천하는 게 마땅했지만, 가정환경을 살피겠다는 조항에 마음이 쓰였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것도 그렇고, 현재 보호자의 직업도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수업을 마친 후 나는 유진이를 불러 제안을 했다. 추천서에 보호자의 직업을 바꾸어 적으면 어떻겠냐고 했다. 마음은 오그라들었지만 인사성 밝은 모습과 단정한 외모가 제격이라는 생각이었다. 합격만 하면 안정적인 보수에 야간 대학까지 다닐 수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맞춤형 일자리라는 내 말에 유진이도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아침 자습시간, 아이들의 옷차림과 낯빛을 살피는데 유진이가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등을 두드려 일으켜 세우자 애써 눈길을 피하는 얼굴이 몹시 상해 있었다. 낯빛이 어둡고 슬픔이 가득 실린 기색이었다. 불안한 예감에 복도로 유진이를 불렀다.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진이의 눈에 물기가 비치더니 속내를 말했다.
“우리 학교에 배정된 두 장의 추천서 중 하나의 기회를 주신 선생님께 죄송해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저는 할머니의 직업을 속이면서까지 입사를 하면 쇠고랑을 차고 사는 느낌일 것 같아요. 단 한 번도 할머니를 부끄럽게 여긴 적이 없으며 세상에서 가장 본받고 싶은 분이었습니다. 팔순을 넘기신 나이에도 열심히 사는 이유가 저 때문이라는데 할머니의 존재를 거부하는 건 제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불편하게 여기는 회사라면 포기하겠습니다.”
주변에서는 유진이가 추천서를 포기한 일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가정환경을 속여서라도 D회사에 입사한 것이 고생길을 면할 수 있는 길인데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교사가 많았다. 책상 하나 들일 공간이 없어서 사과 상자를 책상으로 쓴다는 유진이의 사연을 알고 있었던 터라 한 번 더 설득해보라는 선생님도 있었다.
기회를 놓치면 후회와 아쉬움을 남길 것이라는 생각에 잠시 맘이 흔들렸다. 멀쩡한 차표를 손에 들고서 맥없이 기차를 떠나보내는 격이랄까. 그녀의 학습플레너 맨 앞장에 적힌 ‘내 사전에 포기란 없다’는 글귀가 설핏 떠올랐다. 수업 시간에 ‘아름다운 포기’에 대해 찬반 토론을 할 때 유진이가 했던 말도 기억났다. 포기는 자신을 향한 위안 내지는 합리화에 불과하다고 외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더 이상 유진이를 타이르거나 설복시키고 싶지가 않았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녀의 일상에 다소곳이 내려앉은 삶의 소중한 보물을 빼앗는 것 같아서였다. 은은하게 잔향을 퍼뜨리는 종소리 같은 도덕적 의식 말이다.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양심(良心)이라는 재산을 D회사의 합격증과 맞바꾸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인생은 사건보다는 해석이라는 말처럼 일어난 일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하다. 나는 양심에 부대끼는 일이 생길 때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한없이 부끄러워지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뜨끈해진다. 할머니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자 하는 삶의 태도가 옷깃을 여미게 한다. 그녀는 나의 제자이지만 어쭙잖은 양심에 회초리를 든 스승이다.
유진이는 미용 기술을 배워 남의 가게에서 일하다가 방송용 분장술을 배우겠다며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귀국 후에는 프리렌서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여수에서 미용실을 차려 어엿한 사장이 되었다. 대학에 강의도 나가면서 자신이 하는 일에 당당하고 힘차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눈물이 나도록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