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울렸다. ‘고객님이 신청하신 TV 99만원 처리완료’ 순간, 마음이 바르르 떨렸다. TV를 새로 사야겠다며 칭얼거리던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기어이 고집을 꺾지 않고 사고 말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 전부터 남편은 멀쩡한 텔레비젼을 수시로 구닥다리라며 쥐어박았다. 유튜브와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간드러진 첩을 들이기 위해 멀쩡한 조강지처를 내치려고 안달하는 격이었다. 나는 멀쩡한 기계를 버리는 건 벌 받을 짓이라며 간신히 남편을 달랬었다.
어젯밤에도 그만큼 알아듣도록 이야기했건만 또 누구의 꼬임에 넘어갔을까. 옴팡지게 퍼부을 생각으로 남편에게 전화번호를 눌렀다. 지금은 회의 중이라 받을 수 없다는 기계음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구매 사실을 확인해야지 싶어 연결을 시도했다. 02로 시작되는 번호였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안내원의 목소리는 상냥했다. 혹여 인증번호를 받은 적이 있느냐기에 없다고 했다. 연거푸 서너 개의 질문이 이어졌다. 가족 중에 대신 구매할 만한 사람이 있느냐는 마지막 질문에 시쳇말로 꼭지가 돌았다. 가족이 구매했으면 당사자에게 청구할 것이지 왜 나에게 하느냐며 항의했다. 내가 주문한 적은 결단코 없으니 당장 취소해 달라고 했다.
핸드폰 요금에 합산되어 청구될 거라고 했다. 펄쩍 뛰자 자기들은 대행업체이므로 파악하기엔 한계가 있으니 사이버 조사대를 통해 확인해보라고 했다. 안내받은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목소리에 대고 이런저런 사정을 조목조목 말했다. 알아보겠다며 기다리라더니 잠시 후 걱정이 덕지덕지 묻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미 내 명의로 된 시중은행 통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수억 원이 해외로 인출된 정황이 포착된다고 했다. 내 이성은 막다른 골목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럴수록 차분하자. 법이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되새김질해 보지만 가슴의 방망이질은 멈추지 않았다. 개인정보가 유출된 것 같다. 핸드폰으로 찍어 보내는 신분증이 사기범들의 주요 먹잇감이니 빨리 삭제하라고 했다. 나는 허둥지둥 지령을 따랐다. 나들이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고 여행사의 깃발만 보고 따라가는 꼴이랄까. 원격으로 내 핸드폰의 보안 상태를 살펴보겠다고 했다. 핸드폰을 드나드는 현란함에 나는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금융감독원을 통해 금융 상태를 살펴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잠시 후, 사이버수사대에서 금융사기 관련 조사 의뢰가 와서 통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러저러한 피해 사실을 말하자 내가 가해자가 아니라는 중요한 증거자료가 된다고 했다. 죄인이 먼저 전화할 리가 없지 않냐는 말에 불빛을 만난 듯 와락 안겼다. 대화의 모든 내용은 녹취되니 명심하라고 했다. 전화선 너머에서 다독임과 옥죄임을 넘나들며 나의 생년월일과 이름을 요구했다.
국가 차원에서 엄청난 보안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수백억에 달하는 금융사기에 내 통장이 사용된 정황이 포착된다고 했다. 이틀 뒤, 비밀리에 나는 체포될 예정이라고 했다. 죽음의 순간 영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형사사건에 연루되면 직위 박탈은 물론이고 연금수령도 안된다는데 이제 어떡하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선량한 시민이니 누명을 벗을 방법을 알려달라며 싹싹 빌었다. 무고한 사람이 이십 년 옥살이를 억울하게 했던 일을 들먹였다. 내가 아무리 해명해도 현재로서는 가해자이므로 엄중한 사건임을 인식하라며 꼬치꼬치 금융자산을 물었다. 업경 앞에 선 심정으로 모든 걸 실토하며 지옥에만 가지 않도록 해달라고 했다. 곳곳에서 내 명의로 일어나고 있는 대출을 막고 있으니 수사에 협조하라고 했다. 당연지사인 것을 말해 무엇 하겠는가.
남편 또는 자녀에게 이틀간만 비밀로 하라고 했다. 만약 통화 사실이 발각될 경우 모두 검찰청에 소환될 수 있으니 명심하라고 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누구도 들어서는 안 되니 혼자만의 공간으로 이동하라고 했다. 아바타처럼 움직이며 숨을 공간을 찾았다. 담당 검사를 알려주며 불구속 수사대상이 되도록 해달라고 부탁하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이름과 사건번호를 말하자
“서류 가져와 봐”
종이 뒤적이는 소리가 이삼 초간 들리더니
“당신 이거 얼마나 엄청난 사건인 줄 알아! 여기가 어디라고 전화해. 당장 체포해.”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더니 가슴이 움찔했다.
'대한민국이 민주화되었다고 하지만 권력기관은 아직도 아닌가 보네. 그래서 검찰개혁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는가?’
화장실이 급하니 납작 엎드려야 했다. 약식기소처리 할 테니 절대 주변에 이야기 말라고 했다. 나는 일단은 구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나의 피해액을 정부가 대신 배상하기 위해 은행 계좌로 거액을 예치할 것이니 확인 전화를 받으란다. 앞뒤를 따지고 더듬을 틈이 없었다. 당장 재직 증명서를 발급받아 직장을 벗어나라고 했다. 최고액의 대출을 받아서 은행 통장에 입금하라고 했다. 간첩과 접선하듯 주변을 경계하며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무서움과 서러움에 가족이 그리웠다. 전화 걸고 싶은 맘이 굴뚝이었지만 부부가 모두 사건에 연루되면 가정은 누가 지킬까 싶은 맘에 참았다. 휘청거리는 몸과 맘을 겨우 가누며 도로변에 섰다.
중년의 택시기사가 백미러를 보더니 나에게 어디가 아프냐며 말을 걸었다. 나는 반나절 남짓 전화통을 붙들고 이리저리 끌려 다녔으므로 대꾸할 기력조차 없었다. 손만 대도 툭 쓰러질 지경이었다. 아저씨는 건강이 최고라는 혼잣말로 무안함을 얼버무렸다.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나는 달구어진 철판 위의 참깨처럼 화들짝 핸드폰을 열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통화 연결 음악이 나와 똑같은 기사님이 자신의 전화기를 들었다.
“뭐라고, 또 우리 아들이 다쳤다고? 에이 참.”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보이스피싱인 줄 알지만, 가족의 안전을 확인해야 맘이 놓인다며 멱살 잡듯 운전대를 움켜잡았다. 놀라셨겠다는 나의 짧은 위로에 줄기를 따라 나오는 고구마 캐듯 유행하는 수법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순간 멈칫했던 뇌에 불이 껌뻑 들어왔다. '혹시 나도?' 의심하는 맘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내리겠다는 말에 기사님은 뜨악한 표정이었다. 목적지가 저만치 보이는 장소에서 내리겠다는 손님의 요구가 이상하긴 했을 것이다. 다급한 맘에 거스름돈을 챙기는 아저씨가 민망할 정도로 택시 문을 세게 닫고 도망치듯 발길을 돌렸다. 걸음걸이는 거의 축지법 수준으로 찬 기운을 뚫었다.
허겁지겁 검찰청에 근무하는 조카와 통화를 했다. 확실한 보이스피싱이라고 했다. 털썩 주저앉았다. 풀려난 인질처럼 온몸의 힘이 풀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햇살도 벌써 나만큼 기운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