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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울 Aug 22. 2023

위대한 유치함

<1>고등학교에서는 정규 수업을 마치면, 방과 후 수업이 진행되었다. 일명 보충수업이라고 했다. 지금이야 학생들의 자율적인 선택으로 운영되지만, 당시는 과도기로 전원참여제였다. 민주화 항쟁이라도 하듯 방과 후 수업에 대한 거부감이 들불처럼 번지던 때였다. 그렇지만 교사는 학생들이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자율에 맡긴다고 했지만 '다른 학교는 어찌하나' 곁눈질하기 바빴다.

"방과 후 수업을 선택하지 않아도 하교는 안된다. 교실에서 자율학습을 해야 한다"

담임들의 담합은 아이들의 발목을 다시 잡았다. 이이들은 목줄을 풀어주어도 멀리 가지 못하는 길들인 짐승과 같았다. 나 역시 학생들에게 침묵의 지지를 보내고 있었지만, 교실을 박차고 나갈 자신감은 없었다.

<2>궁여지책으로 '서양 인문고전 독서토론반'이라는 강좌를 열었다. 처음에는 입시에 직접적인 영향도 없고 어려울 수 있는 수업을 학생들이 과연 선택할까 싶었다. 솔직히 내 강좌가 선택받지 않으려는 유치한 계산으로 개설한 강좌였다. 아이들에게 퇴짜를 맞기에 딱 좋은 강좌명으로 십중팔구 폐강될 것이라고 여겼다.

<3>그런데 예상과 달리 호응을 해주는 학생이 제법 나왔다. 오히려 나는 그러한 반응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강좌 개설 안내문의 내용에 속은 것이다.

'나를 바로 세우는 시간, 인문고전으로 내 안의 기적을 만나라.'

학생들은 이 강의를 교과 수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교실을 찾은 학생들의 야릇한 표정이 아직도 또렷하다.

<4>첫 수업 시간, 서로 긴장을 풀고 친밀감을 형성하려고 학생들에게 물었다.

"어떻게 인문 고전 독서에 관심을 되었나요?"

"교과목 수업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요"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멋있어 보이려고요"등 제각각의 이유가 쏟아졌다. 그 가운데서 "멋있어 보이려고요"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실, 솔직한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호메로스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근사해 보이지 않을까. 만약 학생이 대화 중에 일리아스와 오딧세우스의 한 장면을 인용한다면 어떨까. 아마도 달리 보일 것이다.

<5>이렇게 학생들의 대답을 들으면서 문득 ‘나는 어떻게 고전을 읽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해보았다. 학생들의 대답처럼 나도 고전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대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유치해서 부끄럽다. 십수 년 전, 새로운 근무지로 출근했다. 옆자리의 동료와 어색한 인사를 나누는데 그녀의 책상에 놓인 책이 눈길을 끌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였다. 그 두께에 놀랐다. 동료가 너무 멋있게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그때는 진심이었다. 그래서 나도 고전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야말로 지적 허영심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6>어린 시절 공부를 열심히 했던 이유가 동생보다 나은 언니가 되기 위해서 혹은 선생님에게 칭찬받고 싶어서와 같은 이유였다. 결코, 대단하지도 원대하지도 않았다. 어른이 된 지금이라고 달라졌을까. 나는 호기심이 많아서인지 우쭐대고 싶은 맘이 강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배우는 일이 즐겁다. 그렇다고 뚜렷한 목표나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배움의 시작이 거창해야 할 이유가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뭐, 좀 잘난 척하려고, 멋있어 보이려고 시작하면 어떤가.

<7>내 삶의 여정은 어쩌면 칭찬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으며, 뻐기고 싶은 그 유치함의 연속이었는지도 모른다. 글쓰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한 줄도 쓰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 글쓰기의 중요성을 부르짖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서서히 관심을 가졌고 배워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글쟁이라는 명함을 내밀고 싶은 내 안의 유치함이 더 큰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이런 나를 바라보노라면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8>글쓰기는 자기 잘못을 자백하는 일이다. 고백하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갈 일이지만, 아픈 과거를 꺼내 적으면서 자신을 성찰한다. 공소시효가 지났을지라도 자신에게 내리는 '심리적 고통'이라는 형벌을 받고서야 마음의 짐에서 풀려난다. 나를 부끄러워하거나 꾸짖기보다는 겨자씨가 만들어낼 거대한 무엇인가를 상상해본다. 지금도 나의 마음에는 위대한 유치함이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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