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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울 Aug 22. 2023

백두여신 경개여고

<1>나는 지난 봄에 제주도를 여행하던 중 남편의 소개로 생면부지의 한 시인을 만나게 되었다. 제주도 토박이인 그는 모 지방 은행을 명예 퇴직한 사람으로서 오름 전문가였다. 초면인지라 서로가 서먹서먹한 분위기였는데, 거실에 걸린 시화 액자 하나가 우리의 어색함을 깨뜨려 주었다. 그 액자 속에는 '현무암의 침묵'이라는 시가 들어 있었다.

'파도에 젖어 있는 제주도 현무암/화상을 입고 덧나지 않도록/소금물에 소독하고 있는 제주도의 힘/한라산을 지키려는 의지로 검게 탔는가.’

나는 문학 전공 덕분에 조금 아는 척을 해대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고 급기야 자신의 시집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2>약속한 대로 그의 시집이 도착했고, 나도 무언가로 성의를 표하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자랑하고 싶은 맘이었다고 하는 편이 더 솔직할 것이다. 나도 엄연히 등단한 글쟁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은 알량한 자존심이랄까. 내 글이 실린 책을 보냈다. 이후로 우리는 서로를 문우라고 부르며, 가치를 공유하고 좋은 글이 있으면 주고받았다.

<3>어느새 우리는 꿈과 열정, 문학과 인생에 이르기까지 짧은 시간에 많은 공감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달이 뜨면 한라산 중턱에 오르고 쓰레기 봉지와 집게를 들고 제주도 정화 운동에 앞장서는 열혈남이었다. 얼마 전에는 우리 부부와 함께 일 년에 한 번씩 제주도에서 오름 투어를 하자는 제안을 했다. 예순을 목전에 두고서야 시간을 공유한다고 해서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향하는 가치를 공유할 때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4>사마천의 사기(史記) 추양열전(鄒陽列傳)에 이런 말이 있다.

'白頭如新, 傾蓋如故.'

'백발이 되도록 오래 만났어도 마치 처음 사귄 친구처럼 서먹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잠깐 우산을 같이 썼지만 오래된 친구처럼 친밀하게 여겨지는 사람이 있다.'

<5>백발이 되도록 오랜 만남 속에서 함께 할 기억이 있다 할지라도, 가치를 공유할만한 공감이 없다면 그를 결코 안다고 할 수 없다. 비록 수레를 멈추고 잠깐 대화를 나눈 사이일지라도 지향하는 가치가 공감된다면 서로를 충분히 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기억을 공유하는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오직 둘 사이의 가치 공유에 대한 '영혼의 시간'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6> 어떤 것이 되었든 지향하는 가치의 세계가 다르거나 배우고 따를 만한 그 무언가가 담보되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쉽게 싱거워지기 마련이다. 인생이란 끊임없이 관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내가 책을 읽고 글공부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가족이나 직장 등의 수동적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가치 지향적 관계를 추구하고자 함이다. 또한 사상적 교감과 정서적 연대가 가능하여 삶과 죽음에 대한 본질적 고민의 교집합을 이룰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픈 욕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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