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명절이 되면 가끔 애돌이 고모가 생각난다. 고모의 이름은 따로 있지만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없었다. 슬플 애(哀)자와 별 뜻 없는 '돌'의 합성어. 딸 다섯을 낳은 할머니가 맘 내키는 대로 붙였다고 한다. 육남매 중 막내였던 애돌이 고모는 일 년에 두 번, 추석과 설날에 우리 집에 왔다. 우리 집은 고모에겐 오빠네 집이었다. 한 번 오면 사흘 내지는 나흘쯤 우리 집에 머물다 갔다.
<2>고모가 대문에 들어서면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내 마음은 차츰 오그라들어서 얼굴이 빨개지고 급기야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은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뒤죽박죽된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을 아닐 것이다. 고모는 나도 저렇게 되어야겠다는 부러움을 가지게 해준 사람이었다. 동시에 부끄러움은 꾀죄죄한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여자로서의 열등감이라고나 할까.
<3>나의 튼 살과 달리 고모의 살갗은 윤기가 흘렀다. 검은 눈은 크고 쌍까풀이 선명했다. 얼마나 예쁘던지 나는 거울 앞에서 눈을 부릅떠 보았지만 금세 펑퍼짐한 눈매로 돌아오곤 했다. 또 고모가 웃을 때면 보조개가 쏙 들어가서 얼마나 귀여운지 몰랐다. 나도 입 꼬리를 한껏 올리고 볼우물을 만들려고 애써 보았지만, 얼굴만 얼얼했다.
<4>언니 없이 오빠와 여동생만 둔 탓에 분주한 어머니의 손길을 받지 못했던 나를 고모는 꼼꼼하게 살폈다. 소매 밖으로 삐져나온 실밥과 올이 풀려서 덜렁거리는 바짓단을 정리해 주었고 시냇가로 데려가서 머리도 빗겨 주었다. 특히 설 전날에는 연둣빛 납작한 통에서 끈적거리는 연고를 찍어서 내 손에 듬뿍 바르고 문질러주었다. '안티푸라민'이라고 했다. 시원하면서도 화끈거리는 두 손에 벙어리장갑을 끼워주며 자고 나면 보들보들한 손이 될 거라고 했다.
<5>한번은 내 얼굴을 깨끗이 씻기더니 눈을 감으라고 했다.
"예쁜 눈을 만들어 줄께."
고모는 순하게 복종하는 나의 눈꺼풀에 무언가를 바르더니 성냥개비로 눈꺼풀을 쏘옥 들어가게 눌렀다. 눈을 절대 깜빡거리면 안 된다는 말과 함께 눈을 떠보라고 했다. 수술은 고사하고 쌍까풀 테이프조차 없었던 시절, 어린 조카의 마음을 읽었던 것일까. 아교풀로 쌍까풀을 만드는 비법을 배운 나는 눈을 부릅뜨고 있느라 수시로 눈물을 줄줄 흘렸다.
<6>명절이면 오던 애돌이 고모가 두세 해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 빨래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리던 때였다. 골목에서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저만치에서 소리가 들렸다.
'또각또각'
새까만 머리를 어깨까지 길게 늘어뜨리고 긴 외투를 입은 아가씨였다. 누구일까? 내 눈은 휘둥그레졌다. 애돌이 고모가 아닌가. 뾰족구두를 신은 고모가 쭈뼛대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손바닥으로 나의 두 뺨을 감쌌다. 고모에게서 건너오는 화장품 냄새가 참 좋았다.
<7>고모는 방직공장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때는 그게 대단한 직업이고 돈도 많이 버는 줄 알았다. 고모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 왔고 그 속에서 가족들 선물이 줄줄이 나왔다. 부모님께는 내복이나 양말, 오빠에게는 옷, 나와 동생들에게는 종합 과자 선물세트를 사 왔다. 나는 과자를 빼앗길까 봐 품에 안고 잤다. 특히나 껌은 벽에 붙여두었다가 씹기를 몇 날이나 반복했던가.
<8>댓돌에 고모의 뾰족구두 한 켤레가 차분하게 놓여 있었다. 한 번만 신으면 들키지 않겠지. 구두를 몰래 들고 살금살금 나갔다. 발소리는 또각또각, 발걸음은 빼딱빼딱하지만 기분은 날아갈 것 같았다. 지금은 하이힐이라고 말하지만, 그때는 그 신발을 빼딱구두라고 했다. 신으면 어른이 된 것 같고 진정한 여자가 된 듯했다. 하지만 뾰족구두는 중심 잡기가 힘들고 불편했다. 발바닥은 따끔거렸고 다리는 후들댔다. 고모는 왜 이토록 힘든 구두를 신을까. 그렇지만 나도 애돌이 고모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9>그때는 몰랐다. 애돌이 고모가 잘 사는 줄로만 알았다. 명절에만 때 빼고 광내고 온다는 사실도 몰랐다. 엄마는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일부러 좋은 옷을 입고 더 멋진 신발을 신고 우리 집에 오는 거라고 했다. 설마 그럴 리가. 그러나 내가 산업체 고등학생을 잠시 가르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애돌이 고모가 열악한 작업 현장에서 못 먹고 못 입으며 청춘을 노동에 바쳤다는 걸. 엄마는 하루만 더 자고 가라고 했고 고모는 내일 가야 한다고 했다. 우리 집에 오면 서너 밤은 머물렀으니 그때도 그러려니 생각했던 나는 내일 떠난다는 말에 다시 씹으려고 벽지에 붙여 둔 풍선껌을 엄지로 꾸욱 눌렀다.
<10>눈 내리는 아침, 애돌이 고모는 마루 밑에서 뾰족구두를 꺼내 신었다. 그것과 합체가 된 고모의 키가 훌쩍 커졌다. 뿔처럼 우뚝 솟은 고모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머뭇대는 나를 가까이 세우더니 춥지. 고모의 목도리를 풀어서 내 목에 감아주었다. 고모 때문에 행복했던 순간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 나를 꼬옥 안아준 뒤, 댓돌 아래로 내려섰다.
<11>순간, 고모의 발이 옆으로 꺾이는가 싶더니 ‘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구두 뒤 굽이 부러지는 게 아닌가. 순식간에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까스로 몸을 추스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고모는 울상이 되었다.
'뾰족구두가 부서졌으니 이제 못 떠나겠네.'
내 생각은 딱 거기에 머물렀지만, 고모는 결국 어머니의 납작한 신발을 신고 내 곁을 떠났다. 애돌이 고모가 왔던 명절은 기쁘기도 했지만 슬프기도 한 날이었다.
<12>한창 멋을 부리고 다닐 대학교 때, 나는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뛰다시피 등교를 했다. 어머니는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와서 넘어질까 걱정을 하셨다. 불안한 눈빛으로 손사래 치던 어머니와 부러진 뾰족구두를 안고 어쩔 줄 모르던 고모의 모습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다. 지금도 나는 자동차 트렁크에 뾰족구두를 싣고 다닌다. 마음이 가라앉으려고 하거나 위로를 받고 싶을 때 신으면 기분이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