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주 오래 전 한 여인이 공방에 들어섰다. 장인(匠人)의 솜씨를 풍문으로 들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장인은 최상품의 자개를 사용하였으니 조심히 다루라고 당부하며 자식을 떠나보내듯 나를 쓰다듬으며 내주었다. 자개상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날이 까마득하다.
<2>여인의 집에 들어선 날은 나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내 몸통에는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서 우아하게 날개 짓 하는 학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표면에 옻칠을 한 뒤 붙인 패각이 빛을 받을 때 프리즘과 같은 색광현상을 일으켜 아름다운 빛깔을 발한다고 했다. 몸치장이 남다른 까닭이었을까. 우아하고 품격 있다, 화려하면서도 야물어 보인다는 등 칭찬이 이어졌다. 나는 손님이 들락거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밥상 역할을 맡았다. 덕분에 집안의 대소사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저절로 시시콜콜하고 은밀한 소문까지도 알게 되었다. 집안사람들은 한 번이라도 더 나를 붙들려고 애썼다.
<3>여인이 딸의 혼처를 구하려고 한창 분주할 즈음에 안방에서 날벼락 같은 뉴스가 흘러나왔다. 외국의 자본을 빌렸으나 외환 관리를 잘못해서 국가 부도가 났다는 것이다. 여인의 낯빛은 백짓장이 되었다. 장롱에 고이 간직했던 금붙이를 내 머리에 올려놓고 무게를 가늠했다. 여인은 돈의 흐름을 읽는 안목을 지녔다. 상대의 마음을 읽는 능력도 훌륭했다. 사업가로 나섰으면 분명히 성공했으리라.
<4>세상이 바뀌니 생각도 변했다. 생활방식은 숨 가쁘게 달라졌다. 둥근 상에 빙 둘러앉아 밥을 먹는 집이 줄어갔다. 식탁이란 것이 으스대며 어깨에 힘을 주었다. 그래도 여인은 투덜대는 식구들을 달래어서 내 앞에 한 번씩 불러 모았다. 내가 가끔씩 햇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 여인의 노력 덕택이라 해야겠다.
<5>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그 어디에 있으랴. 시집 간 딸이 사 온 식탁이 주방을 점령해 버렸다. 나뭇결이 살아있는 날렵한 맵시에 나는 기가 죽었다. 요즘 세상에 무겁고 관리하기도 힘든 자개상을 누가 사용하느냐며 눈을 흘겼다. 어쩔 수 없이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었다. 침침한 창고 방으로 옮겨졌다. 한줄기 햇빛에 목마른 가재도구들이 축축한 냄새를 풍기며 웅크리고 있었다. 얼기설기 쳐진 거미줄에서 발버둥치는 생명들은 나와 비슷한 처지인 듯 보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 세월의 냉기를 참아냈다.
<6>내 나이가 지천명이 되던 날, 어수선한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목장갑을 낀 장정들이 우리를 거칠게 밖으로 끌어냈다. 눈부신 가을 햇살에 잠깐 어지름증이 일어났다. 살며시 눈을 떠보니 여인의 자부심이었던 자개농과 문갑도 그 위풍당당하던 자태는 어디가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다른 이삿짐들과 함께 마당의 귀퉁이로 내몰렸다.
<7>마당을 둘러보던 딸은 집안의 이곳저곳을 사진에 담았다. 재개발로 없어질 아쉬운 추억을 남기고 싶은 모양이다. 아직도 공작 한 쌍의 빛깔이 선명한 자개농을 어루만지다가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나는 젖 먹은 힘을 다해 멀쩡해 보이려고 애썼다. 꼬꾸라진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이리저리 살피고 두들기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를 데려가겠다고 했다.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복잡한 승용차 트렁크에 실렸지만 얼굴이 긁히는 아픔도 잊었다. 앞날에 대한 기대감이 이토록 삶의 불쏘시개가 될 줄이야.
<8>새로 태어난 듯 기분이 상쾌해졌다. 뒤집어 쓴 먼지를 없애고 보드라운 천으로 닦으니 빛이 났다. 거실의 한켠에 자리 잡고 앉았다. 가끔씩 방문한 사람들이 나를 어루만지며 그들의 추억을 더듬으면 와락 눈물이 났다. 고작 화분 받침대 역할이었지만 억울할 것도 없었다. 여인의 농막으로 실려가 감금당한 자개농에 비하면 하늘의 도우심인지 모르겠으나 감사할 일이었다.
<9>딸의 생일날이었다. 허리는 굽을 대로 굽고 손가락 마디는 휘어질 대로 휘어진 여인을 만났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하지 않던가, 실금이 여인의 주름살처럼 생긴 나를 과연 알아볼까 싶었다. 나에게 와락 달려와 울먹였다. 어루만지는 손바닥의 온기는 그대로인데 손등의 정맥이 낙엽의 잎맥처럼 선명하게 꿈틀거렸다. 나이답지 않게 마음만 싱싱한 모습이 나와 닮았다.
<10>옛것이라는 이름을 달게 된 나를 살핀다. 살아야 할 날과 살아온 세월을 저울질하노라니 가슴이 뻐근해진다. 가끔은 사람들의 마음 밭에 환한 웃음꽃을 피울 수 있으니 아직은 존재해야 할 이유가 남은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