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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울 Aug 22. 2023

너만 힘드나, 우리도 죽겠다.

<1>올해 추석은 몸은 멀리하고 마음만은 가까이 하라고 한다. 전염병이 창궐하니 집단속 몸단속을 잘하라는 경고성 멘트가 곳곳에서 쏟아진다. 의료진을 동원하여 과학적 근거를 들어가며 조목조목 설명하니 따를 수밖에 없다. 며느리들이 당당하게 시댁을 가지 않아도 되는 명분이 생긴 것이다.

<2>내가 새댁이었던 시절엔 명절 하루 전날부터 잔치집이 따로 없었다. 마당에 가마솥을 걸었다. 아궁이를 피우고 투망으로 건져 올린 미꾸라지와 잡어를 뭉근히 삶아 채에 거르고 푸성귀를 듬성듬성 썰어 넣은 청도식 추어탕은 호불호가 따로 없었다. 김이 뭉게구름같이 피어오르는 국에 마늘과 알싸한 고추를 다져넣고 간을 맞추면 된다. 입맛에 따라 화룡점정의 제피가루까지 넣은 추어탕을 먹으며 남자들은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집안 남정네들의 수발을 드는 며느리들은 노동력을 우려내느라 바빴다.

<3>집안이 넓어서 명절날 모이는 식구도 많았다. 얼추 삼십 명 안팎이니 현관은 신발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돔베기를 더 내와라, 나물 전을 더 썰어라, 간장이 부족하다'는 외침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연거푸 과일을 내야하고 성묘에 올릴 음식을 챙겨 산으로 향해야 하니 숨 한 번 제대로 쉴 틈이 없었다. 언제쯤이면 나도 며느리 역할에서 탈출하나 싶었다.

<4>삼십 년 뒤, 며느리가 생겼다. 그 사이, 세상은 변해 버렸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들의 눈치를 보며 언사를 조심해야 하는 시절이다. 새삼 냉장고 정리에 나선다. 대충 검은 봉지에 보관했던 식재료들을 예쁜 통에 담아 정리한다. 처음으로 명절을 쇠러 오는 며느리에게 어수선한 모습이 들킬까 무서워서이다. 혹여 냉장고 문짝에 얼룩이라도 있을까 싶어 행주질에 힘을 싣는다. 세미나 발표를 준비하듯 환경정리에 열을 올리는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난다. 명절이면 시어른을 위해 수선을 피우던 며느리는 이제 며느리가 좋아하는 음식이랑 과일을 채우느라 바쁘다.

<5>남편의 힘도 빌렸다. 욕실 청소를 맡겼다. 세정제와 수세미를 쥐어주며 깨끗하게 청소하라고 했다. 연이어 거실장이며 문틀의 먼지를 닦으라고 했다. 며느리가 머물 방바닥은 쪼그려 앉아서 닦으라며 걸레질시켰다.

"너무하네. 내가 뭐 청소 당번인줄 아나"

식구끼리 편하게 살아야지 뭐하는 짓이냐며 투덜대지만 청소를 멈추지 않는다. 시키지도 않은 베란다까지 정리하며 열심이다.

<6>작은 추석날 저녁에, 아들 내외가 들어선다. 정갈한 옷차림의 며느리가 주방으로 향하자 아들의 긴장하는 모습이 느껴진다.

"뭐할까요, 어머님?"

나는 손사래를 치며 며느리를 소파에 앉으라고 했다.

"아무것도 할 거 없다. 호텔식 뷔페를 배달시켰으니 그걸로 먹자."

<7>비대면 문화가 확산되자 유명 호텔에서 자구책으로 만든 상품인데 명절 특가행사를 한다기에 주문한 것이다. 결혼 전에 며느리가 명절에 음식을 만지느라 기진맥진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나의 선언에 대한 약속이다. 긴가민가하던 아들 부부의 낯빛이 환해진다. 나와 며느리 사이에 혹여 마찰음이라도 생길까 신경 쓰던 아들의 반색이 가관이다. 멋진 시어머니라고 치켜세우며 엄지 척까지 날린다. 나는 손가락 하트로 화답하지만 입 꼬리까지 올라가지는 않는다.

<8>며느리가 내미는 보따리를 열어보니 입이 쩍 벌어진다. 추어탕, 도토리묵, 김치, 송편을 보내왔다. 안사돈이 직접 끓이고 담근 음식이라니 정갈한 마음에 코끝이 찡하다.

"고맙다고 전하렴. 자영업자들이 힘들다고 모두들 아우성인데 사돈집은 어떠노?"

"우리 걱정하지 말고 너희만 잘 살라고 하세요."

<9> 자식을 나누어 가진 인연으로 이 많은 정성들을 받는다 생각하니 며느리가 새삼 귀하다. 특히나 도토리묵을 만드는 과정은 얼마나 번거로운가. 도토리를 주워 껍질을 벗기고 가루를 자루에 넣어 치대는 일련의 행위는 고행이다. 얼마나 고달팠을까. 며느리가 송편을 내 입에다 넣어주며 방긋 웃는다. 녹두앙금이 알싸하다.

<10>추석날이다. 큰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제법 거리가 먼 작은 집으로 가야하므로 서두른다. 아들 내외를 아침 일찍 깨워 큰집에 가니 시숙과 조카들이 모두 모여 있다. 주방 쪽을 건너다보니 휑하다. 질부들이 왁자지껄하게 차례음식을 차리고 있어야 할 공간에 큰형님 혼자서 동분서주다.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니 모임을 자제하라는 정부시책에 따라 오지 않는다고 한다. 애국자 집안이로세. 언제부터 너희들이 그리도 고분고분했더냐. 더욱 괘씸한 것은 질부들끼리 미리 합심하여 오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네 명의 며느리들이 너만 가고 나는 가지 않으면 시어머니들에게 미운 털이 박힐 것이니 대동단결하여 같은 배를 탄 격이다.

<11>내 며느리만 외톨이 신세가 되었다. 전입생이 친구를 사귀려면 시간이 걸리듯 질부들의 합법적 반란에 동참하기엔 시기상조다. 처가에 빨리 보내야한다는 핑계로 큰집 차례만 모시고 아들 내외를 집으로 보낸다. 작은집에 들러 차례를 지내고 돌아오니 아들과 며느리가 달게 자고 있다. 지난 밤, 시댁에서의 잠자리가 편치 않았나 보다. 그 사이에 주방 소리를 죽여 가며 나는 밥상을 차린다. 햅쌀로 밥을 새로 짓고, 미리 장만해 두었던 반찬으로 식탁을 차린다. 문어를 삶고 고기도 푸짐하게 구워낸다.

<12>식사를 미치자 남편이 사과와 배를 깎아서 쟁반에 담는다. 포크에 콕 집더니 며느리 입 앞에 내민다. 딸 없는 남편은 연신 깔깔대며 애교를 피우는 며느리가 마냥 사랑스러운가 보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했으니 나는 질끈 눈을 감는다. 아들 없는 사돈댁을 생각하면 아이들을 독차지할 수 없는 노릇이다. 친정에 빨리 가보라고 재촉하니 어느새 햇살이 기운을 잃고 있다. 처가에 가는 아들 손에 선물 꾸러미를 챙긴다. 신혼살림에 보탬을 주어야지 싶어서 과일도 주섬주섬 챙기고 밑반찬도 담으니 보따리가 커졌다.

<13>떠나는 꽁무니를 향해 두 팔을 흔들고 돌아서니 온 몸이 천근만근이다. 거실 바닥에 큰 대자로 벌러덩 누우며 외친다. 세상의 며느리들아! 너만 힘드나, 우리도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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