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몸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두리뭉실하던 중년의 몸매는 날렵하게 변했고 낯빛에는 생기가 돌았다. 얼마 전까지 건강 면에서 앞서가던 나는 역전패 당한 선수처럼 비법을 알려달라고 매달렸다.
<2>처방전은 너무나 단순하여서 허탈감이 들 지경이었다. 간단한 스트레칭 수준의 운동에 냉 온욕을 꾸준히 했다는 것이다. 많은 돈이 드는 일도 아닌 정보였기에 나의 귀는 격렬하게 팔랑거렸다.
<3>냉온욕은 냉탕 일분과 온탕 일분씩 교대로 4~5회 들어가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했다. 핵심은 냉탕에서 시작하면 냉탕으로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친구의 설명은 환자를 설득하는 의사처럼 과학적이었다. 자신의 겨드랑이를 하수관에 비유하며 림프액과 혈액 순환의 중요성을 조목조목 나열했다. 또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해서 소화기 질병과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설명까지 추가했다. 나는 족집게 과외를 받는 학생처럼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했다.
<4> 목욕용품 바구니를 챙겨 현관을 나서는 순간, 머리가 저울질을 시작했다. 냉탕은 상상만으로도 닭살이 돋았다. 몸매가 남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밉상스럽지도 않은데 구태여 이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따뜻한 이불 속이 그리운 계절에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며 마음이 저울질을 했다. 그러나 건강검진 결과지의 경고성 수치들이 떠올라 발길을 재촉했다
<5>뿌연 수증기가 내뿜는 열기를 뚫고 샤워기 꼭지를 열었다. 쏟아지는 물줄기가 뒤통수를 때리며 구석구석을 타고 내렸다. 망설이던 마음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다. 그러나 막상 냉탕 앞에 서자 몸과 마음이 부르르 떨렸다. 알몸에 감기는 한기를 밀어내려 두 팔로 허공을 휘휘 저었다. 팔다리에 찬물이 닿자 오장육부에 비상이 걸렸다.
<6>겁에 질린 맘을 달래며 발가락을 냉탕에 담그자 으스스한 신음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살갗이 오그라드는 차가움은 허벅지를 타고 가슴을 지나 목구멍에 도달하지만 정신을 앙다물고 몸을 담근다. 숨구멍을 파고드는 냉기에 세포들이 일제히 빗장을 지른다. 이 때 호흡을 길게 하고 생각을 지그시 눌러야 탈출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고 했다.
<7>연신 뿌연 시계를 쳐다본다. 초침이 한 바퀴를 움직일 동안 밀려드는 찬 기운은 시시각각이다. 모근이 일제히 곤두서며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때 한기에 맞서는 숨구멍의 외침을 누르지 않으면 주변의 시선을 끌기 십상이다. 차츰 피부는 얇은 공기층을 만들며 성벽을 세우고 근육을 수축시키기 시작한다. 냉기가 알몸의 구석구석을 핥다가 정수리로 회오리치며 뻗치면 작은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단전에 마음을 모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8> 얼른 생각을 바꾸어 보았다. 삶에서 냉탕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손짓하여 불러들인 적도 없고, 몽둥이찜질로 내칠 수도 없는 돌발 상황이 아닐까 싶다. 수년 전, 나는 정기검진에서 암 진단을 받았다. 인정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어금니가 맞부딪치도록 떨어대고 목이 터져라 하늘을 원망했다. 억울해서 울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떨었다. 끝을 가늠할 수 없으니 인생의 냉탕은 한없이 절망스러웠다. 벗어나려고 분탕질 칠수록 냉기는 뼛속을 파고들었다.
<9>신은 가끔 인간에게 빵 대신 돌을 던진다. 어떤 사람은 그 돌을 원망하며 걷어차다가 발가락이 부러지고 어떤 사람은 그 돌을 주춧돌 삼아 집을 짓는다고 한다. 신이 던진 돌멩이에 맞은 나는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고통은 극복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맞서 보았지만 헛발질이었다. 고통에 맞설수록 더욱 만신창이 되었다. 받아들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견디는 것이다'라는 말을 인정하며 무릎을 꿇었다.
<10>냉골이 된 몸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온탕과 만났다. 후끈한 열기를 들이키며 서너 번 자맥질을 하고 이리저리 몸을 뒤척인다. 열기와 만난 살갗에 가려움과 따끔거림이 번갈아 들락거린다. 몸을 치유하는 과정이니 당황하지 말라던 친구의 말을 기억하며 슬쩍 시계를 본다. 그토록 지루하던 냉탕에서의 일분이 온탕에서는 순식간이다. 냉탕의 기억은 길고 온탕의 훈훈함은 짧다.
<11>하늘은 인간에게 냉온욕을 절묘하게 경험시킨다. 이만하면 되었다 싶은 맘으로 웃노라면 느닷없이 냉탕으로의 입수를 명령한다. 못살겠다며 아우성치고 진저리를 내노라면 어느 순간 온탕이다. 신은 인간이 감당할 만한 고통만 준다고 한다. 인간이 고통스러워할 때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늦추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고통을 통해 인생은 더 단단해지고 진정한 행복을 알아가는 것이다.
<12>다시 냉탕에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몸은 마음과 다르게 바르르 떤다. 그러나 처음으로 냉기를 경험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견뎌내는 힘이 제법이다. 인내의 끈이 끊어질듯 팽팽해진 마지막 순간에 냉기에 대한 저항력은 이중적이다. 웃음과 울음, 밝음과 어둠이 엎치락뒤치락 거린다.
<13>숨결을 고르며 물기를 털어냈다. 냉탕을 받아들이고 견뎌낸 살갗이 단단해진 느낌이다. 신이 던진 고통을 견디고 아름다운 인생의 집을 지은 사람을 닮겠다고 생각하며 냉온욕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