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건너편에 헤어샵이 있다. 동네에서 사람들의 머리 모양을 쥐락펴락하는 원장이 운영하는 곳이다. 요즘 말로 핫플페이스다. 미용실에서 바삐 움직이는 원장의 눈빛은 살아있고 손길은 민첩하다.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어설프고도 미묘한 요구를 재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고객이 의자에 앉으면 수건을 목에 감고 그 위로 가운을 휙 두른 후, 머리카락의 상태를 살핀다. 산만한 정도에 따라 처방을 다르게 내리는 모습에 반하여 단골이 된 지 오래다.
오늘은 미용실의 문이 닫혀 있다. 삼 일간 문을 닫는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상큼하게 변신하겠다고 다짐했던 나는 도저히 덥수룩한 모습으로 돌아설 수가 없다. 이걸 어쩌나. 유리에 비친 모습을 보니 더욱더 오늘 안에 무슨 수를 쓰더라도 손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더 든다.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어디로 갈지 막막하다. 순간,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뜬금없는 기억이다.
지상철에서였다. 저만치 빈자리가 보였고 냉큼 가서 앉았는데 왼쪽에서 낯설지 않은 냄새가 풍겼다. 갓 구워낸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약 기운이었다. 후각을 곤두세우며 고개를 돌리자 할머니 한 분이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고 있었다. 사뭇 만족스러운 낯빛으로 요리조리 자신을 살폈다. 입꼬리를 서너 번 올렸다가 내리더니 고개를 숙여서 정수리 부분을 살피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며 일어서고 싶은 맘이 들었다.
자리를 뜨려는 데 할머니의 질문이 발목을 잡았다.
"새댁, 내 머리 참 이쁘지요?"
아주 오래가는 뽀글이 파마였다. 할머니들은 엉성하게 빠진 머릿속이 훤하게 보이는 걸 감추려고 이와 같은 머리를 한다고 했다. 물기가 남은 곱슬머리는 꼬불꼬불 두피에 꼬여 있었다. 석가모니가 떠올라서 웃음이 나려고 했다.
"어르신, 참 고우시네요."
백 살이 넘어도 여자는 예쁘다는 말에 춤을 춘다더니 할머니는 신이 나서 이야기보따리를 푸는데 파마 가격이 충격적이었다. 미덥지 않아 하는 나를 답답하다는 듯 옆구리를 쿡 찌르며 꼭 가 보라고 했다. 밑져 봤자 본전이지. 전화번호를 내 손에 꼬옥 쥐어주며 설핏 웃으셨다.
변두리 주택가 골목 깊숙한 곳에 미장원은 있었다. 어느 시대의 유물이란 말인가. 타임머신을 타고 반세기를 되돌아간 듯했다. 입구에 달린 빨강, 파랑, 하얀 삼색 등은 힘없이 돌고 있었다. 끈질기게 버티며 손님을 기다리는 늙은 모습이 민속 박물관을 연상케 했다.
쭈뼛대며 들어가자 미용사도 손님들도 모두 할머니들이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뽀글이 파마로 무장한 채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순간 내가 올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몸을 반쯤 돌리려는데 이미 늦었다.
“향수 댁, 손님 받아라.”
일 바지를 입고 선캡을 쓴 늙은 미용사는 힐끗, 한 번 쳐다볼 뿐이었다. 머리를 감고 대기하던 할머니가 가운을 입으라고 명령했다. 다른 할머니는 혹한의 날씨라며 석유난로 앞자리를 내어주었다. 그렇게 무엇에 홀린 듯 의자에 앉았다.
낡은 거울 위쪽에는 빛바랜 미장원 면허와 자격증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른쪽 벽에는 화가 밀레의 ‘만종’이 걸려 있고 그 옆에는 뻐꾸기시계가 매달려 있었다. 뻐꾸기는 노사협의가 결렬된 노동자처럼 일손을 놓은 지 오래된 모양이었다. 정오가 되어도 울지 않았다. 그와 달리 손때 묻은 가위와 빗은 주인의 부름이 있을 때마다 들락거리느라 바빴다. 이 빠진 빗에는 머리카락이 잔뜩 묻어 있었고 헤어드라이어는 선반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 옆에는 낡은 TV가 얹혀 있었다.
향수 댁은 자잘한 롤을 대기시켰다. 굵은 롤을 사용해달라고 하자, 그런 건 없다며 자기 기술을 믿으라고 했다. 그녀는 내 머리통에 숱한 뼈대와 고무줄을 매달면서 인생사를 풀었다. 향수 댁은 한국 전쟁이 나던 해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난리 통에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단둘이 남았다.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했다. 그때 나이 열여덟 살이었고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무엇을 해야 살 수 있을까. 먼 친척 언니의 소개로 미장원 보조원으로 일하며 기술을 배웠다. 먹고 살려면 기술을 익히는 게 최고라고 생각했다.
머리 손질을 잘한다는 입소문이 나서 손님이 붐비기 시작했다.
“명절 때는 새벽부터 고데기가 쉴 틈이 없었지. 올림머리 손님이 많이 대기할 때는 열 명도 넘었어. 그 시절엔 돈이 호박 넝쿨처럼 굴러들어 오는 것만 같았어.”
자랑 반 푸념 반. 그녀의 끊임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살짝살짝 졸기도 했다.
향수 댁은 미용 자격증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그때는 정말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지."
그 이후 차린 곳이 지금의 미장원인데 내년이면 오십 년이 되는 해라고 했다. 그새 손님이 한두 명이 더 왔고 향수 댁과 단골손님 간에 오가는 대화는 짧았다.
“어떻게 해 드릴까?”
“저번처럼.”
세면대로 향했다. 드디어 풀려나는구나. 그 시원함도 잠시. 선 채로 머리만 숙이라는 말에 아연실색이 되었다. 요즘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니. 그러나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지. 어쩌겠는가, 다시 의자에 앉았을 때 뒤에서는 할머니들의 감탄이 쏟아졌다. '진짜 잘 굽혔네. 젊으니까 다르다.' 심사평은 최고점수였다. 그 격렬한 반응은 거울을 통해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내 머리는 영락없이 헨델의 꼴이 되고 말았는데.
세상에 변치 않는 게 어디 있을까만, 날렵한 몸매를 자랑하는 애첩처럼 고객을 호리는 헤어샵에 밀려 향수 댁은 퇴물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향수 댁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할 생각이라고 했다. 의리를 지키는 단골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