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이 그려주는 눈부신 풍경을 가슴에 담으려고 나선 시골 여행이었다. 이름 때문에 한 번 가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지는 오래되었다. 낙동강가에 있는 길로 벼랑을 따라서 난 '개비리길'이다. 그리 높지도 험하지도 않은 솔밭 산길을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이야기가 얽힌 자리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수십 미터 절벽 위로 아슬아슬 이어지는 남지읍의 이 길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좁다.
'개비리길'은 경남 창녕군 남지읍 용산리 용산마을에서 신전리 영아지마을까지 낙동강 변의 마분산 바위 절벽에 난 오솔길이다. 이 길은 새 도로가 나기 이전에는 영아지마을과 창아지 마을에서 남지읍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로 남지 장을 가는 주민과 학생의 등굣길이기도 했다.
그 이름의 유래는 어미 개의 모성애에 있다. 황 씨 할아버지의 개, 누렁이가 열한 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그중에 한 마리가 유독 눈에 띄게 조그마했다. 못나고 볼품없는 조리쟁이였다. 어미젖이 열 개밖에 되지 않아 젖먹이 경쟁에서 항상 밀렸고 황 씨 할아버지는 조리쟁이를 가엾게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황 씨 할아버지의 딸이 친정에 왔다가, 조리쟁이를 키우겠다며 데려갔다.
며칠 후 딸은 깜짝 놀랐다. 친정의 누렁이가 조리쟁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누렁이가 젖을 주려고 산을 넘어온 것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누렁이는 하루에 꼭 한 번씩 조리쟁이에게 젖을 먹이고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폭설이 내린 날에도 누렁이는 나타났고, 어느 길로 왔는지 확인해 보니 낙동강을 따라 있는 절벽 면의 급경사로 인하여 눈이 쌓이지 못하는 곳을 따라다녔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개가 다닌 비리’라는 의미로 ‘개비리’라고 불렀다. ‘개’는 강가를, ‘비리’는 벼루에서 나온 사투리로 벼랑을 뜻한다. 그러니까 강가 벼랑 위에 난 길을 뜻한다. 한쪽에는 푸른 산을 한쪽은 강을 끼고 걷는 길이라 낭만이 굽이굽이 흐르는 길이었다. 그러나 못난 자식을 살리려고 들락거린 누렁이의 심정이야! 오죽했을까. 자식을 향한 마음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매한가지구나 싶었다.
나는 조리쟁이였다. 태어난 지 백 일이 지나도 목을 가누기를 하나, 돌이 지나도 일어설 줄 모르는 아이였다. 사흘이 멀다고 고열로 경기를 일으키는 나를 두고 동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병신을 낳은 게 분명해. 쯧쯧.'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하잖아.'
기성 댁은 그 조리쟁이 때문에 가슴이 시퍼렇게 멍들어야 했다. 연거푸 자식 둘을 잃은 엄마의 가슴은 상처로 너덜너덜해졌다. 생명력이 다한 듯 누렇게 시들어갈 때 얻은 자식이 나였다. 그래서 하늘을 우러러 별을 따낸 심정으로 귀하게 기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별은 바람만 불어도 지쳐 쓰러지는 여린 잎처럼 허약했다. 깜깜한 밤에도 십리 길을 버선발로 오가는 엄마의 등에는 열로 상기된 조리쟁이가 업혀 있었다. 딸의 목숨 줄을 잡고 다니느라 기성댁은 얼마나 애간장을 태웠을까.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시답잖았던 조리쟁이가 제법 제구실하는구나 싶었다. 직장을 구하고 결혼도 했다. 아이마저 낳았으니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하늘도 무심하시지. 조리쟁이가 조리쟁이를 낳은 것이다. 처음에는 칭얼거리는 기색도 없으니 참으로 순한 녀석이라 생각했는데 어찌 된 일인가? 아기의 낯빛이 단풍처럼 붉게 타오르며 손발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분명 울고 있는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순간, 세상이 정지되었다.
‘의료사고’라는 단어가 떠올랐고 병원으로 내달렸다. 담당 의사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며 전문용어가 빼곡한 기록지를 내밀었다. 태어날 때도 신생아실에서도 별 탈이 없었다고 했다. 짧은 상식으로는 그들의 주장에 반박할 수 없었다.
크고 작은 병원을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조리쟁이에게 내려진 추측성 진단은 '성대 장애'였다. 앞으로 목소리를 내기 힘들 거라고 했다. 억장이 무너졌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다른 의사를 찾았다. 엇비슷한 진단 앞에서 나의 몸과 마음이 휘청거렸다.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다른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한없이 부러웠다.
아기 대신 내가 울었다. 억울해서 울고 앞날이 두려워서 울었다. 누렁이는 개비리길이 아무리 위험해도 조리쟁이를 포기하지 않는다. 하늘의 삐친 마음을 돌리기 위한 반성문은 구구절절했다. 삼신상 앞에 엎드려 빌라면 빌었고, 머리털을 뽑으라면 송두리째 뽑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만 울음소리를 내지 못할 뿐이었다. 조리쟁이가 조리쟁이를 안고 허둥대는 모습은 목불인견이었다.
백일 무렵이었을까. 분명히 평소의 울음과 달랐다. 내 귀에만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바늘귀를 통과하는 작은 바람 소리 정도로 가늘었다. 혹여 환청이 아닐까 의심하며 다시 귀를 세웠다. 실낱같은 소리였으나 나에겐 우레와도 같았다. 심 봉사가 눈 뜨는 순간이 이보다 감격스러웠을까. 기적 같은 현실에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또 엉엉 울었다. 산도(産道)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서, 목에 가해진 압박으로 일시적인 현상일 거라는 어느 의사의 말이 옳았다.
개비리길을 걸으며 벼랑의 아찔함과 시원하게 펼쳐지는 풍경은 마음공부에 딱 좋았다. 힐링이란 바로 이런 자연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