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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울 Oct 15. 2023

'두향'의 매화

  우연히 매화축제가 한창이라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이리저리 수소문을 해보니 남도의 매화는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아직은 겨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잦아들기도 전에 봄은 와락 매화를 덮쳐 버렸다. 식지 않는 아쉬움에 젖어 방황할 때 도산서원에 가자는 지인의 전화를 받았다.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자, 내 속마음을 알기나 하는 듯 말했다.

  "그 곳에 가면  매화를 볼 수 있는데!"

  매화에 목말라 있던 나는 덥석 따라나섰다.

  오백 년 전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차로 두세 시간이면 충분했다. 유학 사상의 정신적 고향으로 성역화된 공간에 내리니 숨결마저 조심스럽다. 안동의 도산서원이다. 건축물들은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져 있다. 특히 퇴계 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선생의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한 열정에 옷깃을 여몄다. 지금의 학교 모습과 사뭇 다른 따뜻함이 묻어났다.

  유생들을 가르치던 도산 서당 옆에 매화 꽃망울들이 한껏 부풀어 있다. 도산서원에 있는 매화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도산매’라고 불린다. 퇴계를 닮았다. 퇴계 곁을 지켰을 그 매화가 아른거린다. 이 땅에 슬그머니 다가온 봄, 그 봄의 소리가 옛 선비의 매화 사랑의 마음과 함께 퍼졌다. 절절한 사랑이 묻어나는 나무에 대한 경외감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이고 선 매화나무 사이로 조각난 하늘은 경쟁하듯 푸르다. 선비는 가고 없지만, 매화에 수액처럼 흐르고 있던 선생의 애끓는 마음이 은밀한 이야기를 불러냈다.

  퇴계의 나이, 마흔여덟 살 때의 일이다. ‘두향’이라는 관기가 퇴계 선생의 용모와 인품에 반했다. 어떻게 저 남자의 마음을 움직일까. 거절하지 못하는 선물로 유일한 것은 매화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어렵사리 찾아낸 나무 한 그루를 선물로 보냈다. 예상대로 퇴계 선생은 그 매화만큼은 거절하지 못했다.

  울컥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들며 먼지 묻은 옛 기억이 흙바람을 일으킨다. 꿈꾸듯 서 있는 매화를 보며 내 마음을 더듬어 보았다. 겨울새 하나 깃들 공간을 남기지 않고 가을바람에 나뭇잎을 떨구는 휑한 산처럼 살았다. 인내심도 부족했고 타인에게 공을 들이는 일에 서툴렀다. 사랑을 가꾸지 못하는 내가 못나 보이는 날도 많았다. 그래서 매화가 지독한 추위를 견뎌낸 꽃이라면 쳐다보기가 부끄럽다. 내 안에 독버섯처럼 자라는 이기심과 마주하게 되면 매화에 머리채를 잡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퇴계 선생이 떠날 때, ‘두향’은 저고리 옷고름을 풀어헤치고 ‘차라리 젖가슴 하나를 베어내 당신을 향한 미망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랑이었다. 선생은 ‘두향’의 매화만큼은 반드시 가지고 다녔고 나중에 도산서원을 짓고서는 그곳에 옮겨 심고 애지중지 가꾸었다고 전한다. 생을 마치면서 선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다.

  ‘저 나무에 물 주거라’

  ‘저 나무’는 두향의 선물로 받은 그 매화이다. 죽음으로 완성된 사랑이라고 할까.

  고고한 선비의 땅에 안겨서 매화는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사랑을 고백하듯 하늘을 향해 한 뼘씩 치솟기를 멈추지 않았다. 제 살이 터지도록 추위를 품어내는 성질은 그래도 살아내야 하는 인생살이의 모습이다. 다리가 휘청거려 도저히 지탱할 수 없고 어지럼증에 내몰렸던 시절마저도 나무에는 역사가 되었다.

  뾰족한 이파리처럼 앙칼졌던 내 시간과 대면했다. 매화처럼 고결하지도 순진무구하지도 못했다. 다소곳한 나무를 보며 이리 구부러지고 저리 휘어진 생각들을 잘라냈다.  ‘도산매’와의 만남은 숨통을 조이는 올가미 같은 잡념을 걷어내는 시간이었다. 꽃망울들이 슬며시 나를 쳐다보았다. 그윽한 향기가 밀려들며 웅성대는 듯했다. 매화가 사랑을 향해 피 같은 울음을 토할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한없는 슬픔과 외로움이 하루하루 잦아들길 묵언으로 기도했을 것이다. 한 줌의 눈물을 보태어도 표나지 않는 강물처럼 변함없는 마음으로 받아내고 아파했을 것이다.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기 위해 마음의 입김을 쉼 없이 불어넣었을 것이다.

  봄에 취한 사람들은 말을 잊고 매화 주변을 탑돌이 하듯 걷고 있었다. 그들 속에 나도 끼어들었다. 마음 한 자락 풀어낼 둥지를 더듬으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바람인 듯, 나무인 듯, 하늘같은 매화는 말없이 세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힘들었던 시절을 실토하라고 어깃장이라도 놓아볼까. 푸른 핏발마저도 희미한 옛사랑의 추억으로 가물가물해진다며 손사래를 칠 듯했다. 화사한 듯 올곧은 매화의 마음이 읽었다. 아픔을 보듬었던 매화의 사랑은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았다. 그저 칼바람 부는 겨울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돈에 울고 돈에 죽는 요즘의 사랑 앞에서 지폐에 그려진 퇴계의 매화가 얼마나 역설적인가. 이 매화나무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말 없는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고 괴로움에 무심한 모습이 이토록 아름답게 다가올 줄 몰랐다. 흘러가는 시간 사이에 내가 있다. 구태여 껴안아 달라고 재촉하지 않으리라. 꿈꾸듯 그 자리에 머무는 너를 보며 새살 돋아나는 사랑을 담아낼 수 있으면 그만이다. 내 마음 한 조각은 너의 곁에 남기고 간다. 그때 삶이 힘겨운 듯 너의 허리를 받치고 선 바지랑대가 나를 향해 한마디 외쳤다.

  '야박하게 내치고 옹졸하게 떠밀거나 매몰차게 차별하였던 시간을 잘라내고 우뚝 서라'

  대답하듯 나는 사무친 기도를 펼쳤다. 상처받은 영혼들이 내 마음의 처마 밑에서 쉴 수 있기를 소망하며. 오만과 편견을 버리고 마음의 밭에 매화나무 한 그루를 온전히 키워내게 하소서. 날이 선 경계심을 풀고 생채기로 얼룩진 슬픔이 깃들 수 있도록 사랑 깊은 나무로 자라게 하소서.'

  커피를 마시려고 지갑을 열었다. 지폐 속 매화가 웃고 있었다. 고개 들어 저만치에 선  ‘도산매’에게 다소곳이 물었다. 내 가슴에서 숨을 할딱이는 어린 매화나무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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