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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울 Oct 15. 2023

오래된 사진

  빛바랜 장면 속에서 비녀로 단장한 여인이 웃고 있다. 찍은 지 오십 년도 더 된 사진을 보며 나의 뿌리를 더듬어본다. 한복 차림의 조모가 조부에게 시집올 때 나이는 열여섯 살. 조모는 ‘열 여섯에 너그 할배한테 시집와서......’를 말머리로 이야기를 시작하시는데 그때마다 나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할머니에게 열여섯 살이라는 나이가 있었다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할머니로 알고 지내던 나에겐 애초에 할머니의 처녀 시절은 없었다.

 내가 어린 시절, 할머니의 모습은 늘 바빴다. 언제나 팔을 둥둥 걷어붙인 채 부엌에서 이 방 저 방으로 논밭으로 경보하듯 다니셨다. 생각나는 옷차림은 거추장스럽기 그지없는 한복이었고 머리 모양은 한결같이 쪽진 모습이었다. 다른 할머니들처럼 몸빼바지와 스웨터를 입으면 편할텐데. 양반은 그런 옷 입는 거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손바닥 크기의 밭에 배추와 고추를 심고 이쪽에는 상추와 쑥갓, 저쪽엔 콩과 고구마, 밭 언저리엔 호박과 옥수수 씨앗을 뿌려야지. 책만 읽는 조부를 대신하여 먹거리를 책임지랴. 누대에 걸쳐 독자 집안이었기에 가슴 졸이는 나날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열병으로 연거푸 아들 넷을 잃고 겨우 건진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날밤을 새웠을까. 생각만 해도 숨이 컥 막힌다.

 명절이 가까워지면 더 바빠지고 고단해지던 할머니. 두부도 만들고 조청도 고고 차례상에 올릴 음식도 장만하셨다. 전도 부쳤다. 몸 한번 누일 틈 없이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하시는 일은 백설기를 쪄내는 일이었다. 옹기 시루를 올리면 금방이라도 하얀 김을 내뿜으며 떡을 내놓을 듯했다. 옹기 시루는 시집올 때 머리에 이고 온 것이라고 했다. 재취자리인 할아버지에게 말이다.

  아궁이 앞에서 옹기 시루와 가마솥의 아귀를 맞췄다. 시루에 삼베 보자기를 깔고 찧어둔 쌀가루를 켜켜이 올렸다. 나는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시룻번을 만들었다. 몰랑하게 반죽한 밀가루를 양 손바닥으로 비비면 길게 늘어나는 게 신기했다. 할머니는 뚜껑을 덮고 내가 만든 시루번을 붙인 뒤 불을 지피셨다. 덜 마른 청솔가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때문에 나는 콜록거렸고 할머니는 훌쩍거렸다. 영락없이 억척 아낙네의 모습이었다.

  잠은 언제 주무시는 것일까.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할머니는 늘 깨어 있었다. 일어나보면 무쇠솥에 세수 물이 데워져 있고, 저만치 소외양간 구유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나고 있었다. 나른하게 누운 나를 세수시키실 때는 대충이 없으셨다. 수건을 턱받이하고 이마, 눈가, 귀까지 문지르시고 코 풀기를 시키시던 거친 손.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내 콧방울에 대고 ‘흥’ 소리를 내는 동작을 시킬 때는 꼭 할머니도 ‘흥’ 소리를 냈다. 턱받이를 풀어서 내 얼굴을 닦이시고는 ‘우리 강아지’라며 엉덩이를 툭툭 쳐서 방으로 들여보내시던 그 투박한 손.

  머리수건을 두르고 고추밭에서 일하시던 할머니를 부르면 고춧대가 출렁이는 어디쯤에서 소리가 들렸다. 땅거미가 질 무렵, 땀에 젖은 수건으로 똬리를 틀고 그 무거운 것을 머리에 이고 흔들림 없이 걸었다. 새벽 시장에 그 고추를 내다 팔려면 도대체 몇 시에 집을 나서야 했을까. 십 리 길을 걸어서 오고 갔으니 얼마나 고달팠을까. 한번은 고추 판 돈으로 잠자리 날개처럼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사서 입히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그러셨다. 너는 절대 이런 촌에서 살지 마라.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나를 집으로 돌려 보내기 전날, 할머니께서 하시는 일은 고무 목욕통에 나를 목욕시키는 일이었다. 턱밑, 겨드랑이, 무르팍을 야무지게도 밀어내셨다. 마지막으로 손등에 낀 때를 벗기고 나면, 머리에 비누질해 감기셨다. 아침에 깨어나 보면 머리맡에 새 옷이 개켜져 있고 할머니는 부엌에서 달그락거리고 계셨다.

  열여섯에 고개 너머 마을에서 작은 동네로 시집와서 사신지 칠십 년. 그곳에서만 살았던 할머니는 도시에 나와서 반나절만 지나면 어지름증을 앓으셨다. 공기가 답답하다. 방바닥이 미끄럽다. 물에서 냄새가 난다. 아들네를 트집 잡으려고 작심한 듯 우리에 갇힌 사자처럼 집 안을 빙빙 돌며 안절부절. 하루만 주무시고 가라고 붙들어도 황급히 가셨다. 일급수 물고기가 잠시 삼급수를 만나 헐떡이듯, 살던 곳으로 그렇게 돌아가셨다.

  대문을 나서면서 할머니는 허리춤에 손을 넣고 주섬주섬 뒤졌다. 고쟁이에 끈으로 매단 *줌치를 꺼냈다. 일 원짜리 동전은 가제수건에 돌돌 말아서 보관하던 창고였다. 백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더니 바지 속주머니에 넣어 주셨다. 덤으로 주는 말씀은 애껴 써라. 돈을 멀리하는 조부 덕분에 전 재산을 늘 몸 한가운데 품고 다니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이생의 고생을 다 놓아버리고 밤하늘의 별이 되던 날. 할머니의 전 재산은 십만 원 남짓이었다.


 *시룻번 : 시루떡을 찔 때 김이 새지 않도록 시루와 솥 사이에 붙였던 밀가루 반죽

 *줌치 : 과거 할머니들의 속바지 속의 복주머니를 뜻하는 말로 호주머니를 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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