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조금 늦었다.
급하게 카페 문 손잡이를 잡으려는데 한 여자가 핀볼처럼 튕겨져 내 어깨를 세차게 부딪힌다. 언짢고 당황스러운 상황에 빠르게 뒤돌아보니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힘없이 엉거주춤해 있는 여자가 시야에 들어온다. 강하게 쏘아봤던 가운데 미간이 순식간에 펴진다. 누가 봐도 안쓰러운 그 모습에 그냥 말없이 카페로 들어선다. 잠시 두리번거리다 카페 가장 구석진 곳으로 곧장 향한다.
"죄송해요, 회의가 좀 길어져서, "
"아니에요..."
기운 없는, 강한 압박에 짓눌린 모습. 내 잘못도 아닌데, 아니, 결국 내 잘못인가. 아무튼 그녀의 물에 젖은 휴지처럼, 볼품없이 축 처진 모습에 전투력이 급 줄어들었다. 몇 주 전 그 호기롭던 모습들은 어디로 갔는지, 조금은 허무했다. 상황이 어떻든 좋은 작가임엔 틀림없다. 인간에 대한 따뜻하지만 날카로운 시선, 맘에 들었다. 처음부터 눈에 들어온 시놉이었고, 예상대로 공모전에서 대상으로 뽑혔다. 잘만하면 좋은 파트너가 될 듯해 공도 많이 들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인작가들이 그렇듯 16부까지 끌고 가기엔 부딪히는 것들이 많았다. 요약된 시놉을 본격적으로 길게 늘일려니 내공이 부족하고, 신인이라 캐스팅은커녕 PPL도 붙기 만무했다. 결국 내부 회의 끝에 기성작가를 붙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떻게 생각은 해보셨어요?"
"...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안돼요. 어떻게 내 자식을 남한테, "
"감정적으로 대할 문제가 아니에요, 작가님. 입양 보내서라도 제대로 키우는 게 중요하잖아요."
"원작자 의도란 게 있잖아요, 피디님, "
"드라마는 약속이에요. 대본은 메뉴얼이구요. 순수 문학하실 거면 혼자 가지고 있다 출판하세요. 그거 욕심이에요."
말이 심했다. 때론 상대방이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더 아프게 내뱉을 때가 있다. 결정을 해야 할 때, 머뭇거리는 상대방에게 선택을 쥐어줘야 할 때. 그때인 지금, 내 역할은 단순하다. 어리숙한 상대를 교묘히 코너로 잘 몰아넣고서 정답을 건네주는 일. 기승전 없이 결말은 뻔하다. 결국 내 앞의 작가는 어색한 사인이 그려진 계약서를 건넬 것이다. 그리고 힘없는 자신의 이름 석자를 탓하며 술 담배로 며칠 밤낮을 보내다 각성하고 돌아올 것이다. 스타 작가 이름 옆 자리가 어디냐며 너스레를 떨며 종영까지 뒤만 쫓다 방전될 것이다. 이것이 신인 작가의 입봉이란 이름의 엔딩이다.
이 같은 잔혹한 방송가의 생리를 아직 모를, 그저 울분과 억울함만 가득 찬 작가의 꽉 쥐어진 주먹이 덜덜 떨린다. 한 사람의 남루하나 정성스런 꿈을 강탈한 뒤, 내 역할을 다한 나는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꺼내어 괜히 바쁜 척 캘린더를 이리저리 넘긴다. 미안하게도, 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미안함은 잘 만든 드라마로 보답해야지, 죄책감이 빠진 프로페셔널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