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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랑심 Sep 10. 2021

Ep1.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느 비관주의 의사의 세상 살이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제시하는 방법

"드디어 길가메시는 우트나피슈팀을 만나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우트나피슈팀은 인간에게 죽음이란 잠처럼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6일 낮 7일 밤 동안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는지 해보라고 했다. 길가메시는 할 수 있다며 동의했지만 앉자마자 곧바로 잠이 들고 말았다.

길가메시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우트나피슈팀은 바다의 밑바닥에서 자라는 불로초에 대해 일러주었다. 하지만 길가메시가 몸을 구부려 불로초를 뽑자마자 뱀 한 마리가 훔쳐가 버리고 말았다. 뱀은 약초를 먹자마자 허물을 벗고, 젊음을 되찾았다."


위는 길가메시라는 인물에 대한 서사시의 일부분으로 위키백과에서 가져온 내용이다. 길가메시는 7000년 전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이 발달하던 당시 수메르 지역에 속한 우르크의 왕이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점토판에 쐐기 문자로 써져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전해 진다. 영생을 찾아 떠났다가 뱀에게 영생의 약초를 빼앗기고 허탈하게 되돌아오는 길가메시에게 어떤 여인이 전해 주었다는 다음의 말은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대답이라고 할만하다.


"길가메시여, 당신은 영원한 생명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들이 인간을 만들 때 인간에게 죽음도 함께 붙여 주었지요. 자신의 생명은 자신이 최선을 다해 보살피도록 남겨 두었습니다. 좋은 음식으로 배를 채우십시오. 밤낮으로 춤추며 즐기십시오. 잔치를 벌이고 기뻐하십시오. 깨끗한 옷을 입고 물로 목욕하며 당신 손을 잡아줄 자식을 낳고 아내를 당신 품 안에 꼭 품어주세요. 왜냐하면 이것 또한 인간의 운명이니까요."


스토아학파에서 제시하는 방법

스토아학파는 기원전 3세기에 아킬레스는 달리기에서 거북이를 이길 수 없다는 괴변으로 유명한 제논이 세운 철학의 한 갈래다. 이후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세네카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그 명맥이 이어진다.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은 아니지만 에픽테토스도 스토아학파의 한 사람으로 높은 사상적 경지를 이루었다고 알려졌다.  그는 노예 신분이었으며 결코 화를 내는 법이 없었던 인물이라고 한다.  하루는 그의 주인이 그를 화나게 하려고 그의 팔을 비틀었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주인님! 그렇게 계속 비틀면 팔이 부러집니다." 주인이 화가 나서 더욱 비틀자 팔이 부러져 버렸다. 그러자 그는 "그것 보십시오. 계속 비틀면 부러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다. 주인은 엎드려 용서를 빌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에픽테토스가 욕망과 즐거움에 대하여 자신의 책 대화록에 남긴 다음 말도 인류의 오래된 질문의 답으로 볼만하다. 

"자유는 우리 마음속에 욕망을 가득 채움으써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네. 욕망을 제거할 때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웹튠 작가 김보통이 제시하는 방법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말해주는 처방처럼 오늘을 즐기면서 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내용처럼 욕망을 절제하면서  살라는 주장도 있다. 어떤 방식의 삶이 맞는 방식인 것일까? 지금은 대부분 사람들은 길가메시에게 조언한 여자의 말처럼 산다. 스토아 철학자들처럼 사는 이들은 있기는 하지만 소수다. 물론 나는 길가메시 쪽이 틀리고 스토아가 맞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그 반대도 아니다. 


김보통의 책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의 에필로그도 삶의 자세에 관하여 참고할 만하다.

"이 책을 통해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이것이다. 세상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나와 관계가 없다.  안타깝게도 내 뜻대로 되는 일도 별로 없다. 나는 그저 한 마리 크릴새우가 해류를 따라 흘러가듯 거대한 혼란 속에서 흐르고  또 흐를 뿐이다. 고래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바다를 벗어나기 위해 애쓰지도 않는다. 그저 새우로 살아간다. 싫은 것들을 피하며 가능한 한 즐겁게, 다른 새우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면 그만이다. 

운이  좋다면 전 세계 바다를 누비며 행복할 수 있겠지만 아니어도 괜찮다. 불행하지만 않으면 된다.

다행히 아직도 불행하지 않다."


길가메시의 구절과 맥락이 비슷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 아니 추가된 점이 있다면 작은 것에 만족하고 행복을 삶의 지향점으로 삼지 않겠다는 부분이다.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배부르게 먹는 것을 바라지 않고 배고프지 않으면 만족한다는 삶. 목표치가 낮으니 달성하기가 좀 더 쉬워 보인다. 사실 그것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지만.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인류의 오랜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에 따라 대답은 천차만별로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사람에서도 나이가 젊을 때의 대답과 나이가 들어서의 대답조차 다를 수 있다.   누군가 나에게 그 오래된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무어라고 대답을 할까? 


공자의 제자 자로가 공자에게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공자는 "삶도 아직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느냐?"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공자가 그 대답을 한 나이가 몇 살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제자를 거느리며 가르침을 줄 정도이니 세상 경험이 얕은 젊은 나이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삶에 대하여 모른다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고 한 말과 그리 다르지 않다.


오래된 질문에 대하여 나 또한 대답을 찾지는 못했다. 다만 가묘를 쓰듯 임시 답을 어쩔 수 없이 적어야 한다면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 한 조각이 어디로 흐를지 어찌 알겠으며 어디로 흐른 들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쪽에 가깝다. 

너무 허망하고 비관적 답이라고 꾸짖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는 인생은 원래 무상하고 삶의 의미는 심장하지 않은 듯하다. 누군가는 나에게 심장이라는 별명을 붙여서 부르지만....

참고로 심장은 심원장에서 원자를 뺀 단어다. 재미가 없는 것을 노잼이라고 하고 뜬금없이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것을 갑툭튀라고 하는 것처럼 요즘 젊은 사람들의 단어 축약 성향에 기인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단감 (Sweet Persimmon)

비관주의자의 삭막한 글에 감성을 불어넣어줄 사진 한 장 넣는다. 



내가 요즘 늘어난 뱃살을 빼기 위해 밤에는 기름진 것을 먹지 않고 야채를 주로  먹는다고 하니 아내가 마트에서  사 온 단감이다.  내게   건네면서  "떫은 단감이니까 바로 먹지 말고 한참 두었다가 나중에 숙성돼서 물러지면 먹어."라고 말한다. 성격이 급해 신발이건 옷이건 사면 바로 태그 떼서 그 자리서 입고 물건도 사면 바로 그 자리에서 포장을 까서 쓰는 내 급한 성격을 아는 탓에 던지는  다짐이다. 근데 이건 도대체 얼마나 오래 두어야 달게 익는 것일까? 난 오래 기다리는 것, 오래된 질문, 오래된 물건 모두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심지어 오래된 친구도 거의 없다. 


그나마 오래되어서 좋고 마음 푸근하게 만들어 주는 건, 여전히 잊지 않고 성원해 주시는 오래된 산모분들 뿐이다. (지금은 산모가 아니지만 내게 한번 산모는 영원한 산모다. ) 덕분에 덧없이 무심하게 흘러가는 구름 같은 삶에 잠시 멈추어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하는 순간을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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