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비관주의 의사의 세상 살이
오래전 소망
나는 10년 후에도 건강하게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10년 후에도 내가 살아온 길이 그리 잘못된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10년 후에도 지금의 철학과 소신이 변함없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10년 후에는 마음이 여유롭고 따스한 사람이면 좋겠다.
나는 10년 후에는 책으로 둘러 쌓인 서재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10년 후에는 1년에 한 달쯤은 휴식을 위해 쉴 수 있는 상황이었으면 좋겠다.
몇 달 전 서랍을 정리하다가 오래전에 사용하던 노트가 문득 눈에 띄었다. 위 문장은 노트에 쓰인 것들을 뒤적거리다 발견한 글이다.
요즘은 컴퓨터로 글을 쓰고 저장도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하기 때문이 종이 노트에 글을 쓰는 일이 별로 없다. 컴퓨터로 문서를 작성하면 작성일이 파일 정보로 남기 때문에 언제 썼는지 알기 어렵지 않지만 종이에 쓰면 일기가 아닌 다음에는 언제 쓴 글인지 알기 어렵다. 다행히도 내 눈에 들어왔던 그 글은 작성일이 적혀 있어서 날짜를 알 수 있었다. 2006년도에 쓴 글이니 내가 이곳 마포구 동교동에 개업한지 막 1년이 된 때였고 내 나이 40대 중반 나이일 때다.
버킷 리스트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간단하게 나의 소망을 적은 글이다. 그 글을 보면서 좀 놀랐다. 15년의 세월이면 반 세대나 지난 기간으로 개인의 역사에서 그리 적지 않은 기간이다. 그럼에도 달성된 것이 없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15년 동안 나에게 바뀐 것이라곤 이마의 주름, 떨어진 체력, 나이 드는 데서 오는 완고함 등 내 의지와 관계없이 세월이 흐르면서 저절로 변하는 것들 뿐이다. 하지만 내가 더 놀란 것은 어느 것 하나도 구체적 목표인 것이 없었다는 점이.
도대체 건강하게라는 기준은 무엇인가? 체중인가 체력인가? 그나마 구체적인 목표는 서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정도다.
내가 지금도 허덕거리면서 흡사 끝나지 않는 마라톤을 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사는 이유는 아마도 이렇게 구체적인 목표를 갖지 못했던 것이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구체적인 목표를 갖지 못하다 보니 당연히 달성하기 어렵다. 설사 달성하지 못했더라도 구체적 목표를 설정했다면 목표치의 얼마쯤인지 평가조차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성공한 사람들이 한 것과 너무 동떨어진 삶의 자세이니 내 지금의 처지는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다.
소망은 하나
앞으로 나에게 15년의 기간이 더 주어질지 아니면 그 이하일지는 모르겠다. 살아 있더라도 15년 후면 아마 의사로 활동하는 것은 어려운 나이다. 요양 병원에서 치매 예방을 위해 종이 접기를 하고 있거나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운이 좋다면 시골의 전원생활을 하면서 마당에 심어 놓은 고추 모종에 물을 뿌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산부인과 의사의 평균 수명을 감안했을 때 경기도 어느 납골당에 누워 있을 가능성도 많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학습된 무기력” 탓인지 아니면 천성이 그런 탓인지 모르겠으나 15년 후 어땠으면 하는 욕심도 별로 없다. 과거 그랬듯이 구체적 소망이 생각나지는 않는다. 소신이나 원칙이야 할 수 있으면 지키면서 살면 좋겠지만 지키면서 살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큰 문제이겠는가? 다른 사람도 그렇겠지만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을 것이다. 마음의 여유나 경제적 여유도 크게 바라지는 않는다. 어려워 보여서 지레 포기하는 마음도 없지야 않겠지만 더 크게 바라는 것이 있어서 그런 작은 것들에 대한 미련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바라는 것은 부모님보다는 더 오래 살아야겠다는 것뿐이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산후 맘들께서 병원에 놀러 오시는 일이 없지만 2년 전까지는 종종 놀러 오시기도 했다. 그렇게 놀러 왔다가 가시는 어느 날 배웅하면서 나는 그렇게 말했다.
“저는 그럼 감옥에 있겠으니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산후 맘들께서 웃으신다.
혼자 개업한 산부인과 의사들은 병원을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말한다. 잠시 떠나 있는 때가 있지만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갇혀 지내는 본래 의미의 감옥과 다르게 자신 스스로 갇힌 곳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감옥은 아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나만 감옥에 사는 것도 아니다. 인형의 집의 노라에게는 집이 감옥이었을 것이고, 산후 맘에게는 독박 육아라는 이름의 감옥이 있다. 모습은 다르지만 인간은 모두 자신만의 감옥에 사는 무기징역수다.
삶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혀 지내는 무기수.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삶이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는데 죄수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병자라고 생각하는 게 더 나은 것일까? 잠시 실소가 난다. 병자, 병실, 병원이란 단어는 보통 사람에게도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니겠지만 나처럼 의사에게는 특히 친숙한 단어이니 말이다.
사실 의사와 병자 혹은 환자란 행복과 불행, 빛과 어둠처럼 흔히 대척점에 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의사와 환자란 대척점이 선 것이 아니라 질병이라는 배에 타고 같은 방향을 향해 노를 저어 가는 동반자일 뿐이다. 어느 순간 의사가 환자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환자였다가 의사가 되기도 한다.
얼마나 다른 것일까?
우리 모두 감옥에 살기는 하지만 묶여 있는 족쇄의 길이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과감하게 직장을 그만두고 전셋값을 빼서 부부가 함께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도 있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아 위험천만한 벼랑길을 달리면서 그 낙으로 사람도 있지만 그저 조금 긴 족쇄를 찬 것뿐이다. 모두 삶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매일 먹어야 하고 먹은 만큼 반드시 싸야 한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수초마다 숨을 쉬어야 한다. 하루의 1/3이나 1/4의 긴 시간은 잠도 자야 한다. 매 순간 그것들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데 원해서 하는 것들이 아니다. 스스로든 다른 원인으로 죽든 죽기 전까지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먹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숨 쉬는 것이 즐겁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기본적인 생체 활동을 인간의 자유 의지의 영역으로 두었다면 볼만 했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인간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고 싶은 사람은 두려움에 떨면서 고층 빌딩에서 뛰어내릴 필요 없이 쉽게 죽을 수 있다. 끊임없이 숨쉬기를 하지 못하는 게으른 사람도 다 죽었을 것이다. 그래서 호흡, 심장의 박동, 체온의 유지라고 하는 생명 유지 활동은 의지를 관장하는 대뇌가 아니라, 감정의 영역인 변연계가 아니라 간뇌가 담당한다. 우리의 의지나 감정과 관계없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생명과 관계된 중요한 것들을 제외하고 나서 우리 인간이 스스로 자유 의지로 한다고 생각하면서 하는 일들이 과연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궁금하다. 우리가 고민 고민하면서 결정하고 실행하는 모든 것들이 감옥에 사는 무기징역수가 하루 30분간 허용되었다고 하는 운동에서 운동장을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도는 것과 왼쪽으로 한 바퀴 도는 것 혹은 한 바퀴 대신 두 바퀴 도는 것과 얼마나 다른 것일까?
버지니아 울프의 "어느 작가의 일기"
그런데 인생은 아주 견실한 것일까, 아니면 매우 덧없는 것일까? 이 두 가지 모순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늘 그래 왔고, 또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이 두 모순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서 있는 세계의 깊은 곳까지 다다른다.
다른 한편으로 이 두 모순은 일시적인 것이고, 곧 달아가 버릴 투명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파도 위의 구름처럼 지나가 버릴 것이다. 비록 우리들은 변하고,
차례로 잇달아 그처럼 빠르게, 빠르게 날아가더라도,
우리네 인간은 연속적이고 계속적이어서 우리는 스스로를 통해 빛을 발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빛이란 무엇인가? 나는 인생의 무상함에 너무 깊은 인상을 받아서, 종종 안녕이라는 인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