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제목이 생각나지 않음
역사를 뜻하는 영어 단어 History가 남자들의 기록이라고 생각하여 여자들의 역사를 따로 기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까 Herstory를 기록하자는 말이다. 물론 나는 그런 견해가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히 많은 용어들에서 남성 중심 주의가 깔려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사람을 뜻하는 Man은 남성이라는 의미도 있다. 인류를 뜻하는 말도 Mankind다. 반면 여성을 뜻하는 말은 Woman이다. 그런 점에서는 우리나라는 최소한 언어에서는 비교적 남녀평등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남자나 여자. 사내나 계집 모두 어느 하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단어다. 남녀 차별은 의료 용어에서도 비슷하다. 남자는 Male이고 여자는 Female이다.
또한 여러 의료 행위들이 남성 위주로 발달되어 온 측면이 있다. 피임만 해도 남성 피임법은 오직 정관 결찰술과 콘돔 밖에 없다. 정관 결찰술과 비슷한 난관결찰술, 남성의 콘돔에 해당하는 페미돔 말고도 여성이 하는 피임법으로는 먹는 피임약, 자궁 내 장치, 살정제, 삽입형 피임제인 임플라논, 피임 주사제 등 다양한 방법이 있다. 이는 다양한 방법이 있어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성에게 그 책임이 주로 떠넘겨져 있다는 의미다.
히스테리라는 의료 용어만 해도 그런 성차별적 인식의 단면을 보여준다.
여성의 난소에 대응하는 기관으로 남성에게는 고환이 있고 여성의 질과 음핵에 대응하는 기관으로 남성의 성기가 있지만 여성의 자궁에 해당하는 남성의 대응 기관은 없다. 자궁은 유일하게 여성에게만 있는 기관이다.
자궁을 의미하는 라틴어는 hystero다. 그래서 자궁 적출술은 hysterectomy, 자궁 내시경은 hysteroscopy라고 한다. 정신과학에서 다루는 신경증 중 하나인 히스테리성 인격장애는 여성의 자궁을 의미하는 hyster가 어근이다. 히스테리는 이기적이고 극단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성격으로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공격적이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인격 장애다.
이런 인격 장애에 대하여 히스테리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히스테리 증상이 주로 여성에서 많이 나타나고 주기적인 패턴을 보이는 것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씩 생리를 하는 여성의 자궁이 히스테리의 원인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에서야 틀린 판단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상당히 오랜 기간 여성의 자궁이 필요 없는 누명을 쓰고 있었던 셈이다. 남자에게도 자궁이 있었다면 지금의 히스테리를 뜻하는 말은 다른 말로 바뀌었을까?
김치녀니 된장녀니 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한남충이나 한남 유충이라는 말로 남녀 간의 갈등이 심각한 수준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찬성과 반대 의견을 가지고 서로 헐뜯는 글이나 영상도 상당히 많다.
페미니즘에도 비교적 온건한 쪽의 활동을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워마드처럼 강력한 투쟁 활동을 하는 이들도 있어 스펙트럼이 넓다.
페미니즘은 비교적 여성의 인권이 낮은 나라,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의 경제적 발전을 이룬 나라들에서 주로 이슈가 된다. 경제력이 떨어지는 나라들에서는 그다지 부각되지 않는다. 유럽의 나라들처럼 사회 경제적 수준이 발달한 나라들에서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경제적 수준이 어느 궤도 이상 올라갔지만 아직도 남성 중심의 전통적 문화가 있기 때문에 페미니즘 활동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앞으로 페미니즘이 추구해야 할 방향이 어때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나는 깊은 지식이 없다. 다만 지금처럼 남성과 여성이 지나치게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누가 더 양보하고 어떤 점을 개선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각자의 생각이 다르겠지만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많이 필요해 보인다.
나는 낙태 문제에 있어서는 페미니즘 활동가들과 견해를 달리한다. 그러나 여성의 인권과 경제적 대우 특히 임신과 출산, 육아 관련한 문제, 출산으로 인한 경력 단절 등의 문제에서는 여성들의 편이다. 육아 문제만 해도 모든 신생아와 영유아를 국가가 책임지고 무료로 돌보는 탁아 시스템의 마련이 시급히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부족하지만 여러 차별 부분들이 과거보다는 점진적으로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어느 한순간에 극단적인 변화를 꾀하는 것에는 부작용이 크기 때문에 사회의 공감을 이끌어 내면서 나아갔으면 하는 생각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사례는 아니지만 과거 여성에게 투표권조차 없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에서 보듯 여성들의 피해 의식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왕 자궁을 들먹거렸으니까 자궁과 관련한 오래전 에피소드를 하나 말씀드린다.
외래 진료 때 만났던 60대쯤의 할머니의 사례다. 할머니께서는 40대쯤에 자궁에 근종이라고 하는 혹이 생겨서 자궁을 들어내는 자궁 적출술을 받으셨다고 한다. 내가 그 할머니를 진찰했을 때는 수술한 지 20년도 넘었고 단순한 노인성 질염으로 며칠간의 치료를 받으시면 되는 상황으로 특별한 점이 없었다.
자궁은 근육으로 된 조직이기 때문에 이곳에 생기는 종양은 근육으로 된 혹이라는 의미에서 근종이라고 부른다. 근종은 크기가 작고 증상이 없는 경우에는 양성 종양이기 때문에 별 다른 치료 없이 경과만 관찰하면 되지만 크기가 지나치게 큰 경우나 생리통이나 생리과다 같은 증상이 심한 경우에는 근종만 들어내는 근종 절제술이나 자궁 전부를 들어내는 자궁 적출술을 시행해야 한다.
나는 질염 치료를 받으시는 며칠 동안 잠자리를 피하시고 탕 목욕도 피하시라는 등의 간단한 주의 사항을 할머니께 말씀드렸다.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젊었을 때 자궁을 들어내서 그 후 잠자리는 할 수가 없는데 무슨 잠자리냐고 부끄러워하시면서 말씀하셨다. 내가 자궁을 들어내도 잠자리를 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씀드리자 할머니는 상당히 놀라는 표정이었다.
할아버지의 말이 자궁을 들어냈으니 잠자리는 불가능하다고 의사가 말했다는 것이다.
내 추측이지만 당시 의사가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다. 자궁을 들어 내도 잠자리를 하거나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할아버지께서 다른 목적으로 그렇게 거짓으로 알려준 것 아닌가 생각을 한다. 여하튼 할머니는 그 후 수십 년간 남편과는 잠자리를 가져 본 적이 없으며 남편이 젊은 여자와 드러내 놓고 외도를 해도 자신이 해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묵묵히 감수하면서 그 고통과 외로움, 서러움을 가슴으로 삭였다고 한다.
그 말을 하면서 지난 세월의 회한 때문에 할머니는 진료실에서 펑펑 눈물을 쏫으시면서 우셨다.
젊은 의사 앞에서 부끄러움도 잊고 울음을 그치지 못하실 만큼 컸을 지난 세월의 억울함이랄까 허망함이 그때 내게도 전해져서 가슴이 아렸던 기억이 난다.
나는 히스테리라는 용어를 볼 때마다, 페미니즘 운동을 볼 때마다 가슴이 조금 답답하다. 히스테리에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페미니즘에서는 주장이 조금은 부드러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