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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랑심 Mar 03. 2022

Ep6. 은평구 개업 시절 3

[나의 개업 역사]

나는 그곳에서  심상덕 산부인과라는 이름으로 5년 정도 개업했다. 그때는 출산율이 지금처럼 낮지 않았다. 한 달에 스무 명 혹은 서른 명 남짓한 산모의 출산을 도왔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턴 수료 후 전문 과목을 정할 때 내가 산부인과를 택한 이유 중 첫째는 다음에 또 오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과목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산부인과를 택한 둘째 이유는 인류가 존속하는 한 출산은 영구히 이어질 것이므로 내가 할 역할이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출산이 영구히 이어질 것이라는 내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고 여전히 사람들은 아기를 낳는다. 그러나 지금처럼 출산율이 대폭 줄어들어 출산을 돕는 의사의 숫자가 그리 많이 필요하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과거의 그 누구도 예상 못한 수준으로 가히 재앙이라 할 정도의 낮은 출산율을 해마다 갱신 중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은 0.81명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낮다. 작년  출생아 수는 26만 500명으로 통계 작성을 시작한 1970년 이후 최저치라고 한다. 내가 은평구에 개업하던  무렵인 2000년대에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1.3명대였고 출생아 수는 2001년에 56만 명이었다.  지금 수준보다 출생아 수가 거의 정확히 두배 정도 수준이다. 그러고 보니 그 당시의 분만 건수는 지금 분만 건수  10명에서 15명의 딱 두배쯤 된다.  


출산율도 높았지만 은평구 개업 시절에는 지금과 달랐던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요즘은 임신 확인을 약국에서 임테기 (임신 테스트 키트)를 사서 여성이 직접 하지만 그 당시에는 임신을 확인하려면 병원에 가야만 했다. 초음파 검사에서 태낭이 나타나기 전의 초기 임신 확인을 위한 임신 검사 키트는 1976년에 최초로 개발되었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일반 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아서  내가 개업한 초기에는 사용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지금은 임신 진단뿐 아니라 몇 가지 암의 조기 진단 키트까지 개발되어 있다.  정보와 기술의 측면에서 독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의사의 역할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대신 앞으로는 의사라는 존재가 공감하는 사람 혹은 위무자의 역할로 변화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닥터 심파티쿠스 혹은 닥터 엠파티쿠스라는 조어까지 만들었던 내 생각은 머지않은 미래에 아마 현실화될 것이다.

여하튼 그때는 초기 임신을 진단하려면 여성의 소변을 받은 다음 그것을 임신한 토끼의 소변 혹은 혈청에서 추출한 시약과 섞어서 응집 반응이 있는지 현미경으로 관찰하여 판단을 했다. 시약과의 미세한 응집 반응을  현미경을 통해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틀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때는 질염의 원인균을 확인하기 위한 냉검사도 직접 진료실에서 현미경을 보아서 판단했다. 지금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번거로워서 질염의 확인은 분비물을 채취하여 검사실로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저런 이유로 외래 진료 환자도 적지 않던 시절이었고 내가 외래 환자를 하루에 최고로 많이 본 경우가 80명 정도쯤 본 것인데 지금은 꿈도 꾸지 못할 숫자다. 그때는 하루 평균 외래 환자를 100명도 넘게 보는 산부인과 의사도 많았는데  지금도 대학병원에서는 아마 그렇게 많이 보는 의사가 드물지 않을 것이다.


그 당시는 출산하는 산모와 거의 비슷한 숫자로 낙태 시술도 했다.  나는 몇 년 전 낙태 근절 운동에 앞장서면서 지금은 낙태 시술을 일절 하지 않지만 그때는 낙태 시술도 하던 때였다. 물론 낙태를 하겠다고 하는 산모의 목소리가 반가웠다고 할 정도로 처참한 지경에 도달한 적은 없었다. 분만을 하지 않아 수입이 그다지 좋지 않은 개원 의사들에게는 낙태 시술로 얻는 수입이 경영에 절대적으로 도움이 된다. 그래서 어떤 선배 의사는  유비무환이던 어느 날 낙태를 하러 왔다고 하는 산모의 소리를 들으면서 내심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고 하면서 스스로가 비참했다고 고백하신 분도 있었다. 참고로 유비무환이란 비가 오면 환자가 없다는 뜻의 의료계 은어다.

나는 당시 분만을 돕는 개원의였기 때문에 내가 그때 낙태를 도운 것은 경영이 어려워서는 아니었다. 당연히 낙태를 하려고 온 산모도 설득해서 말리고는 했다. 낙태 관련 이야기는 나중에 마포구로 이사 오면서 낙태 근절 운동을 할 때 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낙태 수술에는 당시의 수가 기준으로 대략 10여만 원에서 2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  출산하고 퇴원하면서 산모가 내는 비용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적지 않은 액수다. 따라서 지금도 개원하고 있는 산부인과 의원 중에는 낙태 전문 병원이 있을 정도로  낙태 시술은 산부인과의  주 수입원 중 하나다. 그런 사정 때문에  은평구 개업 시절 동안이 내가 개업하고 있는 동안 유일하게 빚을 지지 않았던 시절이다.

산부인과의 3대 주 수입원이 분만 수입, 낙태 관련 수입, 여성 성형 수술 관련 수입인데 이때는 자주는 아니지만 여성 성형 수술인 이쁜이 수술도 한두 달에 한 명 정도 했다. 이쁜이 수술은 정식 명칭은 회음부 성형 수술이다. 출산으로 늘어나게 된 질 조직을 일부 잘라내서 질을 좁혀 주는 수술이다. 그런 수술을 함으로써 남편한테 이쁨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의학적으로는 크게 효과는 없으며  자기만족을 위해서 받는 수술에 가깝다. 은평구 개업 초에는 아무것도 모르던 탓에 개업한 다른 선배들이 하는 것들은 거의 다 따라 했다. 물론 지금은 나 자신의 경험과 철학을 바탕으로 별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시술들은 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병원을 운영한 대가가 적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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