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재미있는 책이 아니다
1. 많이 아프겠네. 약 사다 줄까?
2. 요즘 벌이 독하다던데 조심하지 그랬니.
3. 산이고 들이고 그렇게 칠랑 팔랑 나다니니 벌에 쏘이는 거 아니냐. 그러게 누가 그렇게 싸돌아 다니랬냐?
4. 침묵
매주 일요일마다 휴무인 주방 여사님을 대신해 아내가 입원 산모들의 식사를 위해 병원에 온지도 벌써 몇 년이 되었다. 오늘 점심 준비를 위해서 온 아내는 나를 보자마자 어제 청계산에 갔다가 벌에 물려서 뺨이 벌겋게 부었다면서 잔뜩 부풀어 오른 뺨을 보여준다. 박 씨 부인이 되었다고 너스레를 떤다. 왠 박 씨 부인? 박 씨 부인은 나중에 이뻐지기라도 하지. 내게 호 하고 불어 달라는 의미는 아닐 터이고 아마도 이렇게 힘든 와중에 도와주러 왔으니 고마워해라라는 의미였을지 모르겠다. 글의 처음에 적은 항목은 그런 아내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리스트다. 뺨을 보여주는 아내에게 내가 실제로 한 말은 그중 세 번째 말이다. 아마 다른 사람이 그런 나를 봤다면 내 뺨을 세게 한 대 때려 주고 싶어 할 것 같다. 그런 점은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살면서 그 순간 그 장소 그 상황에 적당히 어울리는 말을 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숱한 순간들에서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꼭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다. 4가지 말 중에서 첫 번째 말이나 그것이 아니라면 두 번째의 말을 해 줄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이다. 아니면 차라리 침묵을 하거나.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천냥 빚을 갚는 것보다 말 한마디가 더 어려울 수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다.
입원 산모의 점심 설겆이를 끝내고 저녁 준비하기까지 3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어서 깨져서 부족한 식기와 식재료를 사기 위해 양평동에 있는 코스트코 홀세일에 아내와 함께 갔다. 병원 주변에는 몇 곳의 대형 마트가 있지만 이곳이 가장 가깝기도 하고 물건 값이 저렴한 것치고는 품질도 괜찮은 편이라 종종 이용한다. 아내는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을 카트에 채우고 나는 카트에 몸을 반쯤 걸치고 아내의 발걸음에 맞추어 느릿느릿 밀면서 따라 걸었다. 식기가 있는 주방 용품 코너에 다다랐을 때 옆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는 젊은 커플이 보였다. 신혼부부이거나 아니면 곧 결혼을 앞두고 신혼살림을 장만하는 연인처럼 보였다. 여자는 자그마한 인버터를 들고 괜찮은지 어떤지 남자의 의견을 물어보는 중이었다. 의견을 물어본다기보다 사실은 여자는 이미 그 인버터가 마음에 들어서 사고 싶은 상태였고 남자에게 통보를 하는 상황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 대화 내용을 옮겨 본다.
여자: “우리 이거 사자. 괜찮아 보이지?”
남자: “인버터야? 그거 꼭 필요해?”
남자의 대답은 부드러웠지만 여자가 기대한 답은 아니었던 듯하다.
여자: “그럼. 이게 있으면 요리할 때 편해. 가스 레인지처럼 열이 나서 덥지도 않고.”
남자: “우리 이미 오븐도 가지고 있잖아.”
여자: ”오븐 하고 달라. 내 친구 중에 혼자 사는 애들도 이런 건 기본으로 다 있어.”
남자: “꼭 필요한지 잘 생각해서 해.”
여자는 다소 장황하게 그 물건이 있으면 얼마나 요긴하게 쓰일지에 대하여 남자를 설득하는 중이었지만 효과는 별로 없어 보였다. 남자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다정했지만 여자의 의견에 대하여 반대라는 건 분명했다.
여자: “이건 싼 거야. 이것보다 훨씬 비싼 모델도 많아.”
남자: “…”
여자: “비싸서 그래?”
남자: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왜 그런 식으로 말해?”
여자: “그럼 왜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
남자: “아니 비슷한 것이 있는데 쓸데없이 물건 욕심부리는 것 같아서 그래.”
여자: “다르다니까. 기능이 다르다고.”
여자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처음에 통보를 하던 톤에서 동의를 구하는 톤으로 바뀌었다가 이제는 짜증과 원망이 섞인 톤으로 변했다. 그 상황을 나와 함께 목격했던 아내가 한마디 했다.
아내: “바보 같은 놈.”
나: “쉿. 들리겠어. 조그맣게 말해.”
물론 아내는 그 남자에게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말하지는 않았고 조그맣게 들릴락 말락 혼자 소리로 말한 거였다. 하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찔리는 것이 있었던 나는 그 소리가 매장에 달린 스피커를 통해서 나오는 것처럼 유난히 크게 들렸다. 젊은 날의 내 모습도 그 남자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남자에게 가서 귓속말로 조용히 조언해 주고 싶었다.
나: “당신. 이 여자 사랑해?”
나: “헤어질 것이 아니라면 아무 소리 말고 사라고 해. 아니 더 비싼 거 사라고 해.”
나: “그래도 그녀는 더 비싼 것 사지도 못해. 당신이 필요한 건 비싼 것도 턱턱 마음대로 사면서 여자가 필요한 건 그렇게 토를 다는 좀팽이 짓은 못 봐주겠어.”
물론 내 마음속으로 혼자 한 말이다. 젊은 날의 나한테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는 말이다.
남자와 여자의 옆에 계속 있으면 불편해할 것 같아서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두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는 동안 물끄러미 여자의 모습을 곁눈질로 보았다. 둘은 여전히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커플이 인버터를 결국 샀는지 안 샀는지는 모른다. 샀던 안 샀던 여자의 마음은 이미 산산이 부서져 있을 것이다. 저런 바보 같은 놈과 평생 함께 하려고 생각한 여자가 조금은 불쌍해 보였다. 그러다가 아내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니 그 여자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심하게 불쌍한 여자가 내 옆에서 걷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야수파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앙리 마티스는 결혼할 여인에게 청혼하기 전 "당신보다 그림을 더 사랑한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의 아내가 된 아멜리 파레르는 “모자를 쓴 여인” “화가 아내의 초상” 등 많은 그림에서 마티스의 모델을 했으며 여기 실은 그림 “대화”도 마티스 부부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부부간에 서서히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고 판단한 마티스는 어느 날 이 그림을 아내에게 보여 주면서 "이 그림처럼 당신을 대했다"며 사과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 그림에서 여자는 권좌에 앉은 여신의 모습처럼 표현되었고 남자는 여신에게 예를 갖추는 자세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그림으로 둘 사이를 봉합하기에는 그 둘의 갈등이 너무 깊었다고 한다. 결국 39년 간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두 사람은 이혼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결국 시간을 보내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보내고 어떤 사람은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점점 추세가 바뀌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남편 혹은 아내와 함께 있으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물론 그 시간은 침묵의 시간과 대화의 시간으로 나누어진다. 침묵의 시간은 따로 조심할 것이 없지만 대화의 시간은 상당히 신경을 쓰고 배려도 하고 조심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설저유부 (혀 밑에 도끼가 있다.)라는 말처럼 대화는 침묵보다는 훨씬 강한 힘으로 상대에게 가서 닿기 때문이다. 특히 조심해야 할 시기가 언제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아내가 임신하고 있을 때, 아내가 우울해할 때, 그리고 임신한 아내가 우울해할 때라고 말하고 싶다.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대화는 대화가 아니다.
-여기 실은 그림-
앙리 마티스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