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재미있는 책이 아니다
1."성관계를 한 번이라도 하신 적 있나요?"
2."어제 남편이랑 잠자리를 했나요?"
3."성관계 시 통증이 있었나요?"
4."최근 3, 4주 이내에 성관계를 하신 적이 있나요?"
5."성관계를 한 것은 72 시간 이내인가요?"
남자 친구는 있는지, 성관계는 한 적이 있는지를 의사가 환자에게 물었다가 성희롱으로 문제가 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얼마 전에 보았다. 그렇다면 위의 질문들도 충분히 그런 성희롱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 기사에 나온 사례는 산부인과 의사가 아닌 일반 의사가 질문한 것이라 문제가 된 것이며 산부인과에서는 방문 목적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성관계와 관련한 질문을 하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물론 의학적 필요 때문에 하는 질문이다.
1번은 자궁경부암 검사나 질염 검사를 위해 오신 분에게 부인과 진찰인 내진을 하기 전에 묻는 질문이다.
2번은 임신 시도를 하기 위한 배란 초음파 검사를 하면서 배란기가 막 지난 난임 환자에게 묻는 질문이다.
3번은 생리통 증상을 보이는 자궁 내막증 의심 환자에서 내막증의 3대 증상 (난임, 생리통, 성교통)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다.
4번은 하복부 통증이나 비정상 질출혈을 증상으로 오신 분에게 임신 관련일 수 있어 확인차 묻는 질문이다.
5번은 사후 피임약 처방을 오시는 분에게 약을 처방하기 전에 묻는 질문이다.
산부인과는 여성의 내밀한 병력에 대한 문진과 또 음부에 대한 진찰인 내진을 하는 과목이다. 오래전 의과대학 본과 3학년 산부인과 임상 실습을 돌 때 내가 산부인과 교육 담당 전공의 (에듀케이션 치프) 선생님께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선생님, 산부인과 하시면 매일 여성의 성기 관련한 진찰을 직업으로 하게 되실 텐데 결혼하여 부부 생활에는 영향은 주지 않는지요?
내가 물은 그 질문에 대하여 교육 담당 전공의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로서는 궁금했지만 대답하기 불편한 질문이거나 어이가 없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때는 내가 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산부인과 의사를 직업으로 하다 보니 나는 더 이상 그 질문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 답은 요즘 말로 케바케 (Case by Case)다. 즉 사람마다 혹은 상황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여성의 음부를 거의 매일 보다 보니 대체로 산부인과 의사들은 아니 최소한 나는 성적인 점에서의 신비감이랄까 기대감은 상당히 낮은 것이 사실이다. 물론 반대로 그런 점으로 하여 성욕 과다가 되어 어떤 산부인과 의사는 환자를 마취한 상태에서 성추행하였다는 기사도 보기는 했다.
여기서 갑자기 성관계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전에 겪었던 어떤 일 때문이다.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 병원 산부인과 전공의로 근무하고 있을 때다. 어느 날 일반외과 팀으로부터 긴급한 연락을 받았다. 26세의 젊은 여성을 급성 충수돌기염(맹장염)이라고 진단하고 응급 수술 (맹장 수술)을 시행하고자 개복하였는 데 맹장 부위는 아무런 이상 소견이 없다는 것이다. 반면 복강 내에 소량의 혈액과 우측 난관의 팽대(꽈리처럼 부풀어 오르는 현상) 소견이 발견되어 우측 난관 임신(자궁외 임신)이 의심되어 산부인과 팀에게 연락을 취하게 된 것이었다. 마침 내가 당직 근무를 하던 날이라 산부인과 1년 차 주치의와 함께 손을 소독하고 수술장에 들어갔다. 조그맣게 개복한 우측 하복부를 통해서 살펴본 복강 내 소견은 전형적인 난관 임신(자궁외 임신)의 소견이었다. 맹장 수술을 위해 절개한 부위는 너무 좁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복부를 더 확장하여 절개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복강경으로 이용한 수술을 하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임신된 난관 부위를 제거하고 제거한 조직을 병리 검사 실로 넘겼다. 병리 검사실에서 온 최종 소견을 바탕으로 최종 진단은 자궁외 임신 (우측 난관)으로 결론을 내렸다. 결국 환자는 수술 시간도 훨씬 늘어나고 수술 상처도 크게 남는 손실을 입게 되었다.
여기까지 들어보면 의사의 오진이 만들어 낸 한심한 일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환자는 본원의 내과 병동 간호사로 3시간 전부터 시작된 극심한 하복부 통증과 오심, 구토 등의 증상을 이유로 저녁 8시경에 응급실로 내원하였다고 한다. 환자의 증상으로 보아 응급 의학과 의사는 응급 개복 수술이 필요한 외과적 복부 상황 (Surgical abdomen)으로 판단하였으며 1. 급성 충수돌기염, 2. 급성 췌장염, 3. 급성 장염 또는 장간막염, 4. 자궁외 임신, 5. 난소 종양 꼬임, 6. 생리 전 증후군 (월경통)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환자는 생리 중이 아니었고 미혼여성으로 성접촉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하는 점, 초음파상 난소 낭종이 관찰되지 않는 점으로 하여 자궁외 임신, 난소 종양, 생리 전 증후군은 배제되었다. 따라서 산부인과 의사의 진찰은 필요가 없었다.
그 외 다른 임상 증상이나 검사 소견으로 보아 응급실 담당 의사는 급성 충수돌기염의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젊은 여성이고 구토 등 임신 증상과도 비슷한 증상이 있어서 소변이든 혈액이든 임신 검사 정도는 체크해볼 만하다고 생각은 되지만 환자가 얼굴까지 벌게지며 성관계가 없음을 주장하는 데다 의료 보험 제도상 병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검사는 의료 보험에서 삭감되어 결국 병원의 손실로 남게 된다는 점등으로 인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환자는 몇 주전에 성관계를 하였고 임신 증상이 있어서 동네 산부인과를 방문하여 임신으로 진단받고 인공 중절 수술(낙태 수술, 내막 소파술)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로서는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안심하고 임신의 가능성 더 나아가 성접촉의 가능성마저 극구 부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궁외 임신도 임신의 일종이지만 자궁 안을 긁어내는 내막 소파술로는 치료되지 않는 병이다. 진단 또한 쉽지 않기 때문에 오진이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병이다. 처음에 진료를 했던 의사가 자궁외 임신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추적 검사하면서 살펴보아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였으니 일차적으로 오진의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의료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몸에 대해서는 결국 자기 자신이 최종 피해자이고 결정자라는 사실이다. 때문에 자신의 모든 의료 정보는 의료진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진단과 치료 방향을 상의해서 판단해야 한다. 정보를 정확히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일차 수술을 맡았던 외과 의사가 오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불과 십여 년 전까지도, 그리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미혼 여성이 혼전에 성관계를 하는 것에 대하여 좋지 않게 보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근무하는 병원에서 자신의 성관계 여부를 솔직하게 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결국 거짓말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점도 이해가 가는 면이 있다. 지금은 미혼 여성의 혼전 성관계에 대하여 아주 용인하는 사회 분위기는 아니지만 이전보다는 많이 너그러워진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통계 조사는 하지 않았지만 30년 전쯤 내가 수련받을 때 산부인과를 방문한 여성의 산과 정보 (출산 경험, 출산 횟수, 출산 방법)와 성경험 유무를 진료 기록부에 기록할 때 미혼 여성 중에 성경험이 없는 여성들은 적지 않았다. 대략 10명 중에 7,8 명은 성경험이 없었다. 한 세대인 30년이 지나서 우리 병원의 경우로 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병원을 방문한 미혼 여성 중에 성경험이 없는 경우는 아주 드물어서 10명 중에 한 명도 보기 힘들다. 그만큼 성과 관련하여 사람들의 인식과 문화가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는 젊은 여성들도 피임에 대하여 말하거나 성관계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과거처럼 금기시하거나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경향은 많이 사라졌다. 오래전 그 간호사가 요즘에 그런 상황으로 병원을 방문하게 되었다면 아마 성관계 사실을 솔직하게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한때 애란원이라고 하는 미혼모 (지금은 한부모 가정이라고 부름) 입소 센터에 있는 산모들의 산전 진찰과 출산을 도운 적이 있다. 연령대는 다양하기는 했지만 보통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 많았다. 애란원 원장님께서 언젠가 주신 통계에 따르면 임신하게 된 동기는 예상치 못한 성관계, 임신을 처음 안 시기는 보통 3개월 이후 늦으면 7개월, 피임 방법은 하지 않았거나 했더라도 체외 사정법 혹은 배란 주기법, 출산을 하게 된 이유는 대부분 낙태 시기를 놓쳐서 혹은 낙태할 돈이 없어서였다. 물론 이건 벌써 10년도 전의 이야기이다. 10년 정도 미혼모들의 산전 진찰과 출산 진료를 돕다가 지금은 진료는 하지 않고 있어서 요즘의 사정은 잘 모르겠다. 아직 법적으로 혼인 신고를 하지 않은 채 임신한 산모를 보면서 가족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임신 기간을 보내고 출산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에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적이 많았다. 피임 방법에 대하여, 그리고 피임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초래될 임신에 대하여 본인이 감당 가능한지 미리 알고 준비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었다.
본인의 산부인과 병력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해 엉뚱한 수술을 받게 된 환자나 원치 않는 임신을 하였다가 출산하고 입양을 보내게 된 처지의 미혼모나 혹은 대비 없는 성관계로 인하여 임신이 되어 결국 낙태 시술을 선택하는 산모나 모두 다 성과 관련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성관계를 하면 언제나 임신이 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임신이 된다고 해서 항상 정상 임신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이 모든 원치 않는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여성 당사자다. 임신을 원하든 혹은 원하지 않든 성관계를 가지는 모든 남성과 여성은 성에 대하여는 올바른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그 어느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면서 어느 칸에서 내려야 가장 적게 걸어서 환승할 수 있는지 정성 들여 확인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정도의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 성이라는 과실의 단맛 만을 누리려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임신, 출산, 피임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적정 수준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중요하다. 임신이라는 것은 출산으로 귀결되든 낙태로 귀결되든 빠른 환승역을 몰라서 집에 조금 늦게 가는 것과는 많이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
파블로 피카소는 현대 미술에서 주목할만한 작품을 남긴 화가로도 유명하지만 여성 편력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피카소가 사귄 여성 중 한 명은 사진작가인 도라 마르다. 피카소의 다섯 번째 연인이다. 피카소가 쉰다섯 살, 도라 마르가 스물아홉 살에 둘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피카소는 부인 올가가 있었으며 마리 테레즈라는 정부도 있었다. 마리 테레즈와의 사이에는 딸도 두었다고 한다. 부인과 애인이 있는데도 도라를 연인으로 삼았기 때문에 도라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순탄할 수가 없었다. 이런 복잡한 관계 탓에 도라는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그녀가 하도 자주 울어서 피카소는 "나는 울지 않은 도라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 실은 그림은 피카소가 울고 있는 도라 마르를 모델로 하여 그린 작품이다. 사랑이든 수정란이든 제대로 된 길이 아니라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남는 것은 고통과 울음밖에 없다.
-여기 실은 그림-
파블로 피카소의 "우는 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