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모르겠다는 말
짝꿍 없이는 이번 연휴가 너무 길었다. 엄마는 일하러 가고, 몸 컨디션은 좋지 않았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서 보내기에는 아쉬웠다. 하고 싶은 일도 별로 없었지만, 어딜 가나 사람도 많을 것이고…. 또 연휴에 즉흥적으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많지 않았다. 에무 시네마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나미비아의 사막> 포스터와 시놉시스를 보게 되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자기 자신에 대한 뚜렷한 목표 의식이나 가치관 없이 흘러 가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 20대 소녀 카나. 연애에 있어서도 그저 자신의 마음이 가는대로 죄책감 없이 자유로운 관계를 추구하던 그녀는 어느새 자신만을 바라봐 주는 남자친구 혼다와 자유분방한 매력을 지닌 하야시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그렇게 카나는 두 남자 사이에서 그 무엇도 선택하지 못한 채 애매한 관계를 이어가는데… 일도, 사랑도 무엇 하나 제대로 손에 넣지 못하고 불안 속에 표류하는 카나의 삶은 과연 진정 그녀가 원하는 바를 찾아갈 수 있을까?
(사진 및 글 출처 : 에무시네마 홈페이지)
충분히 방탕하게 연애해 왔던 과거와 불안 속에서 표류하고 있는 현재를 지나고 있는 요즘. 왜인지, 오늘 꼭 이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상한 시놉의 독립영화를 연휴에 갑작스러운 연락에 보러 가줄 만한 친구도 없었고, 본가에 간 짝꿍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건 참을성이 부족했다. 다른 영화를 아무리 봐도 끌리는 게 없었다.
마침 오늘 저녁 용산 CGV에서 상영한다는 것 아닌가! (에무시네마는 이틀 뒤..) 그런데 할인이나 쿠폰을 해보려 해도 일이 안 풀렸다. 혼자 영화를 보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홀린듯이 예매를 하기 시작했다. 정가를 내는 한이 있더라도 봐야겠어!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GV가 있는 날이라는 걸 알았다. 어쩐지…. 개봉 이틀 전에 상영하는 것도 그렇고, 할인 적용도 안 되는 것이 이상했다.)
감상한 영화의 느낌은 (거의 언제나 그렇듯) 시놉이나 포스터의 느낌과는 달랐다. 나로서는 도저히 어느 젊은 시절 방랑기 혹은 방황기를 보는 이의 서사라고 읽히지 않았다. 일본(이라고 부르지만 뒤틀린 자본주의의 나라라는 점에서 어디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 터이다.), 여성, 이성애자, 비정규직, 정병인 한 여성의 삶의 조각에 푹 젖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거의 비슷한 상황인 나로서는 공감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장면들이 많았다. GV에서 누군가 질문으로 비도덕적이고, 제멋대로이고, 폭력적인 카나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질문이 있었다. 나는 왜 이해가 되지 않는지가 더 궁금했다. 어떻게 당신은 도덕적일 수 있으며, 비폭력적일 수 있으며, 제멋대로 하고 싶은 충동에 휩쌓이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카나가 갑자기 분노에 휩싸이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나는 알고 있다. 서서히 미쳐가는 여성으로 사는 느낌을. 감독이 카나 같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나는 그 사람이 나라고 생각했다.
감독은 원래 계획하던 영화를 엎어버리고, 카와이 유미를 중심으로 새롭게 오리지널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정말로 '카나'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오래도록 아른거린다. 포스터의 카나는 의도한 듯 아파 보이기도 하고, 권태로워 보이기도 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는 오묘하고도 섬짓한 표정이지만, 영화 속의 카나는 달랐다. 카와이 유미는 개인적으로 사진발보다는 영상발이 훨씬 잘 받는 배우인 것 같다. 어느 스틸컷을 보아도 영화 속의 카나를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척 아름답고, 또 생기가 넘치기도 한다. 그가 달리거나, 웃거나 또 화내거나 할 때면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팬이 되었다는 얘기다..)
*아래 구분 선부터 다음 구분 선까지 스포일러가 포함된 리뷰이니 주의해 주세요!
잘 모르겠다는 말
네팔 여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여객기 한대가 고장 나는 바람에 활주로가 하나 밖에 없는 카투만두 공항이 멈췄다. 항공권이 변경되어 뜻하지 않게 중국의 한 공항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곳은 직원 중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딱 한명밖에 없기에 비 중국인 여행객들에게 꽤나 악명 높은 공항이었다.
발이 묶인 여러 외국인들 사이에 어쩌다가 한국인 6명이 같은 게스트 하우스에 묵게 되었다. 그 중 한분은 중국어를 매우 유창했는데, 걱정으로 가득한 나에게 이 단 한마디, "팅부동"만 기억하면 된다고 했다. 팅부동을 핸드폰 메모장에 적고 떨리는 마음으로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직원이 가로막는다. 뭐라하며 짜증을 내는 것 같은 그에게 던진다.
"팅부동"
공항직원이 눈이 휘둥그레 해지면서 끄덕이며 문을 열어준다. 이후 나는 긴 줄과 막힌 문들을 마치 신이 된듯(?) 뚫으면서 무사히 입국할 수 있었다. 팅부동의 힘은 가히 대단했다. 그 뒤로 이 팅부동 무용담은 종종 회자되는 웃긴 여행 이야기가 되었다.
그런데 그 말을 반갑게도 영화 마지막에서 만날 수 있었다. 카나는 애인과 긴 싸움을 마치고 앉아서 가족들과 시작한 통화에서 '팅부동'이라는 말을 하며 마침내 웃는다. 떠오르는 추억의 우스움과 함께, 그날의 희열과 비슷한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이어지는 권태로움과 불안의 와중에서 '모른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것들을 뚫을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는지.
카나는 영화 내내 자신을 기만하고, 또 타인을 기만한다. 심각한 이야기를 하며 괴로움을 토로하는 친구의 말보다 옆 테이블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해 버리고 마는 영화 첫 장면에 연출을 시작으로 카나는 옆에 있는 이들의 마음도, 자신의 마음도 알아주지 않는다. 카나가 제모 샵에서 일할 때 건조한 목소리로 "조금 차갑습니다."에서 또한 이러한 기만을 보여준다. 상대방이 어떤 감각을 느낄지 알 수 있지만 알고 싶지 않은 상태, 하지만 알아주는 척 하는 상태. 속상했던 이야기를 하는 친구에게도 제모 샵의 손님들에게도, 애인들에게도,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카나는 아는 척만 하지 진짜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지도 못한다.
그러다 마침내 '알지 못한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분노와 불안과 불신과 짜증은 픽, 하는 웃음으로 새어나간다.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것도 괜찮다. 아니, 알지 못하는 게 차라리 낫다.
나미비아의 사막
카나의 손에는 담배 아니면 핸드폰을 놓치 않는다. 친구의 이야기를 호스트바에 있을때도, 심각한 이야기를 할때도, 아플때도 담배는 늘 손에 있다. 쉴 새 없이 실시간으로 연결되어 있고, 연결감이 끊어지는 순간 무언가로 채우려 한다. 이 세계는 분명히 뭔가 잘못되었다. 삶은 무언가 잘못되어있다. 하지만 그저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서 하는 시도들은 계속된다. 입과 손에 무언가 물어버리고, 손에 닿는 누군가를 구속하면서.
카나는 혼자 있을 때 종종 나미비아의 사막 영상을 본다. 나비미아의 사막은 카나가 갈망하는 세상을 상징한다 생각했다. 내가 나로 살아도 어떤 피드백이 오지 않는 세상. 조용한 세상. 시끄러운 세상에서 그간 누군가에게 의지하거나,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으로 해소하던 카나에게 나비미아의 사막은 어떤 모순을 보여준다.
카나가 불화할 때 들리는 테이프가 거꾸로 감기는 것 같은 시끄럽고 불쾌한 사운드트랙이 펼쳐진다. 정신없이 말들이 오가고,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들을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듣지 않아도 되고, 그저 존재 할 수 있는 나미비아의 사막의 생명체들은 그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는 곳이다. 나를 공허하게 채우는 매체를 통해서 침묵에 대한 갈망을 채우는 곳. 갈 수도 없고, 사실 어디에 있는지조차 관심도 없지만, 그러기에 더더욱 갈망할 수 밖에 없는 곳. 닿을 수 없는 곳. 아무도 없기에 마침내 외롭지 않을 수 있는 곳.
그러다가 나미비아의 사막이 멀지 않은 곳에 만날 수 있었다. 영화 속에서 캠핑하는 장면은 두 번이 나오는데, 첫 번째 캠핑은 하야시의 가족들과 간 캠핑, 두 번째는 옆집 여성과 간 캠핑이다. 첫 번째는 장소만 자연이 되었을 뿐 그 전의 삶과 다르지 않다.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 바쁜 사람들 사이에 홀로 앉아있는 카나. 타인의 판단과 시선에 스스로를 옭아매고 사람들이 많음에도 외로이 떠돈다. 지루하고 권태롭기 짝이 없다.
두 번째 캠핑은 카나에게 위로다운 위로를 해주는 순간이다. 이곳이 현실의 나미비아의 사막이다. 테라스에 나와서 달빛 아래서 그저 '현존'하는것 처럼 보였던 이웃. 그와 함께 숲속에서 불을 피우고 얘기하다가, 아무짝에도 도움도 안 되는 대화 따위 집어치우고 그들은 불 위를 뛰어다니면서 놀기도 한다. 어린 시절 좋아하는 노래가 겹친다.
아이 때는 몰라도 되던 것들을 이제는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아니 아는 척해야한다. 평범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버리지 못한 것들을 버리기 위해서는 조금 미쳐야하기도 하다. 그건 어쩌면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버리기만 하면 된다. 실컷 미쳐버린 카나와 이웃은 그 누구의 시선도 살피지 않아도 되는 깊은 숲속 불 위를 넘어 다니며 카나의 본모습 -신나고, 아이 같은-그런 모습들을 회복해 나간다.
가방을 돌리며 신나게 달리다가 텀블링하는 카나가 좋았다. 피어싱하고 기뻐하는 카나가 좋았다. 마구잡이로 신경질을 내며 화를 내는 카나가 좋았다. 불 위를 넘나들며 웃는 카나가 좋았다.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카나는 제멋대로 일지 몰라도 생명력이 넘쳤다. 내게 <나미비아의 사막>은 청춘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의 이야기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어긋나 있고, 제멋대로 이고, 누군가를 기만하기도 하고 죽도록 괴롭히기도 하고, 괴롭힘당하기도 하는, 할 수밖에 없는 뒤틀릴 대로 뒤틀린 세계. 이 속에서 더 이상 '네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이상한 거야?'라는 질문들이 필요 없는 날들을, 아이처럼 웃어버릴 수 있는 날들을, 닿을 수 없는 나미비아의 사막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