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끝의 온실> 리뷰

by 샴스 Shams
XL (4).jpeg



“이 소설을 쓰며 우리가 이미 깊이 개입해 버린, 되돌릴 수 없는,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곳 지구를 생각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면서도 마침내 그것을 재건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마도 나는, 그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
- 김초엽 작가의 말 중



2000년대 초, 환경파괴, 기후변화라는 말로 내게 처음 알려진 인간에 의한 지구 생태계의 파괴는, 이제 기후위기를 넘어 기후재앙이라는 말로 변화했다. 그 사이 그 영향은 아침에 지저귀는 새들이 사라진 ‘침묵의 봄’을 넘어서 일상적인 이상기후와 재난은 수많은 종들의 멸종과 더불어 지구를 장악한 인간종에게도 멸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린다.


지구 끝의 온실은 지금의 인간의 과학기술중심주의가 앞으로 만들어낼 대멸종의 시기를 보여주고 있다. 휴머노이드가 일상화되고, 호버카를 타고, 영양캡슐로 음식을 대체할 수 있는 시대에, 기후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과학자들은 오히려 생명들을 앗아가고 지구표면을 새까맣게 덮어버릴 ‘더스트’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더스트는 인간들의 삶을 철저하게 파괴되고, 되돌릴 수 없는 재앙을 맡게 된다. 동물들도, 식물들도 모두 죽어버린 폐허가 된 지구에서 어찌 된 일인지 내성을 가지게 된 인간들과 커다란 돔을 지어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일부만큼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소설이지.. 싶으면서도 물은 대체 어디서 구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배경이다.)


~소설의 구체적인 내용과 리뷰~ *스포일러 다수 포함

돔 시티는 철저한 계급사회다. 선택받은 일부만이 살만한 삶을 살고, 돔 밖의 사람들은 철저하게 이용당하거나 죽임 당한다. 돔에 찾아온 난민들을 전투로봇으로 살해하고, 떠밀린 사람들은 내성종이나 식량, 정보, 물자들을 이용해 돔시티 입장권을 얻는다. 그리고 그 돔들마저도 종종 파괴되는 불안전한 삶으로 묘사되지만, 이래나 저래나 인류는 그 안에서 이어지고, 이후 더스트를 억제할 수 있는 디스어셈블러를 개발해 인류의 문명이 회복된다… 는 게 재건 이후의 인류가 만들어낸 서사이다.


소설은 더스트 시대와 재건된 시대를 교차로 보여주며, 더스트를 없애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지만 역사 속에서 드러나지 못한 소규모 자족공동체 프림빌리지와 그곳과 연관된 모스바나라는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조망하며 사라져 가는 제2의 역사를 서술하고자 한다. 인류가 이어진 것은 소수의 안전한 돔과 재앙을 만들어낸 과학의 만회로서 회복된 것이 아니라, 돔 밖의 내몰린 존재들과 식물 종의 얽힘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소설 속 반전이다.


그 이야기는 온실 밖의 처절한 삶을 산 어린 자매 나오미와 아마라를 통해서 시작된다. 내성종이라는 이유로 연구소에서 인간실험에 사용되던 실험체인 이 둘은 우연한 기회로 연구소에서 탈출해서 살 곳을 찾아 떠돈다. 우연한 만남 속에서 유일하게 믿을 만한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어버리거나, 더스트 폴을 견디어 내고, 사냥꾼을 피해서 장소를 옮겨 다니고, 폐허 속에서 영양캡슐과 잠잘 곳을 찾아 헤매면서 그들은 철저하게 희망을 잃어버렸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은 삶일 것 만 같다. 그래도 그 둘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삶을 가까스로 이어간다.


그러던 중 함정인지 희망인지 모르는 대안공동체 프림빌리지에 대한 소식을 듣고, 가서 죽나 여기서 죽나 마찬가지라는 심정으로 그곳을 찾아간다. 어린 자매를 마을 사람들을 받아주고, 그곳에서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삶, 그러니까 마을의 일원으로 존중받고, 최소한의 삶의 안전들을 보장받을 수 있는 존엄한 삶을 경험한다.


프림빌리지에는 기묘한 구석이 있는데, 그것은 언덕 위에 더스트로 가득 찬 온실에 혼자 사는 이상한, 그러나 모두가 묘하게 의지하고 존경하는 과학자 레이첼과 그 옆에서 유일하게 레이첼과 소통하는 지수라는 존재다. 그 둘은 프림 빌리지를 생명이 살만한 공간으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프림빌리지가 전 지구적으로 거의 유일하게 시도하고 있는 농업이 가능하도록 땅과 종자를 개량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전파한다. 그러나 거대한 더스트가 찾아온 밤, 앞으로의 미래의 안정적인 생존과, 일부의 죽음을 두고 고민하다 엄청난 우점종이자 더스트를 없앨 수 있는 개량종 모스바나를 심었고, 그로 인해서 더스트에 약한 마을 사람들도 함께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모스바나에 미칠듯한 번식력으로 그동안 마을을 살리던 농업을 잃었다. 마을은 다시 한번 흔들렸다. 사람들은 싸우거나 떠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침입자들로 인해서 불타는 마을을 두고, 지수는 마을 사람들에게 모스바나를 나눠주며 프림 빌리지를 다른 곳에 만들자고 말한다.


~줄거리 끝~


소설 속에서 인간은 인간과 지구를 파괴하고 살리는 역할을 한다.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지고 악마적일 수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희망과 사랑을 발견할 것이지 이야기하는 스토리텔링은 울림을 준다. 소설 속 프림 빌리지는 잠시나마 펼쳐진 이상적인 공동체를 그린다. 비록 민주적 의사결정제도가 없더라도 갈등 없이 유지가 되며, 물자가 부족한 세상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한 구조를 구축한다. 공동체를 보호하는 적절한 수단이 있으며 기술 개발하고 그것을 적재적소에 운용할 수 있는 인력들이 있다. 그것이 인류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선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 같았다. 희망이 있다면 바로 이런 '순간'들에 있는 건 아닐까.


한편으로는 소설을 읽으며 인간의 ‘신’적인 면모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다. 더스트를 없앨 수 있는 모스바나는 사이보그인 레이첼의 연구의 산물이고, 그것을 각지로 옮긴 것 또한 프림 빌리지에 살았던 인간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학과 인간의 활약이 딱히 탐탁지는 않다.


특히 모스바나를 두고 그것이 자연의 선물인지 인간이 만들어낸 도구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 모스바나는 자연인 동시에 인공적인 것이지요. 모스바나를 이루는 구성요소들은 모두 자연에서 왔고, 그것은 인위적인 개입에 의해 모스바나라를 총제가 되었으며, 다시 자연의 일부로 집입했습니다. 인간이 모스바나를 이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반대로 모스바나가 인간을 이용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둘은 분리할 수 없고, 분리할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 모스바나와 인간은 일종의 공진화를 이룬 셈입니다.


인간의 입장에서의 ‘공진화’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로 착취를 기반으로 두고 있다. 하지만 착취만 당했다고 하기에는 그 대상들은 강했다. 그러니까 인간에 의한 폭력만을 강조하는 것 또한 어떤 의미로 대상화이자 인간 중심주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폭력을 감춰서는 안 된다. 이 소설에서는 프림 빌리지나 모스바나를 가지고 신격화하거나 예술화하는 장면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 지점에서 인간- 자연 관계에서 자연을 대상화하지 않고 관계 맺는 것이 무엇인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자 그 차제로서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 분리하지도 대상화하지도 않는 관계란 무엇인가.


소설이 가지고 있는 흡입력도 그렇지만, 더불어 에코페미니즘적인 사유 또한 확장해 볼 수 있는 이 소설은, 평소에 소설보다는 영화나 웹툰을 즐겨 소비하는 나에게 소설의 재미를 알려주었다. 이후로 여러 가지 소설들을 읽으면서 재미를 맛보고 말았다고!

keyword
작가의 이전글<육식의 성정치>를 읽고 : 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