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다!”
외마디 외침으로 시작되었다. 차의 속도를 천천히 줄였다. 갓길에는 작고 하얀 강아지 한 명이 있었다. 우리와 눈을 마주치고는 꼬리의 흔들림이 점점 커졌다. 누군가 창문을 열고 “이리 와” 하고 말했다. 그가 다가오려고 하자 다른 누군가 또 말했다. “부르지 마!” 나는 천천히 차의 속도를 높였다. 우리는 바쁘게 읍으로 가던 중이었다. 차가 출발하고 옆자리에 앉은 이에게 유기견 보호소에 전화해 보자고 했다. 보호소는 이것저것 묻더니 ‘포획’하는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다.
이걸로 된 건가 싶었지만 알량한 선의가 이렇게 깔끔하게 마무리될 리가 없지. 읍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가는 길, 그이는 같은 자리에 여전히 우리를 보고 있었다. 차를 세웠다. 몇 번 망설이더니 결국 우리 쪽으로 와서 올망졸망한 눈으로 쳐다보는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걸 보니 들개가 아닌 게 분명했다. 보호소에 전화해 보니 이곳으로 왔지만 찾지 못했다고 했다. 주변에 민가나 개가 사는 흔적이 없었고, 강아지의 몸은 온통 진드기투성이었다. 몇 명의 진드기를 몸에서 떼어냈다. 진드기를 죽이는데 망설임 같은 건 없었다. 같이 차에 있던 사람들과 짧은 논의를 했고, 보호소에 데려다 주기로 했다.
가는 길 온갖 생각들이 들었다. 나는 어째서 진드기를 죽이고, 이 한 명의 강아지를 살릴 힘이 있는가? 그리고 이 힘으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정말 최선일까? 인스타에 올려봐야 하는 건가? 집에 일단 데려갈까? 입 밖으로 차마 꺼내지 못한 고민이 스쳐 가는 동안에도 차는 멈추지 않았다.
보호소에 진입하자 그곳의 철창 속 개들이 일제히 짖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우리에게 다가오며 개들을 보고 조용히 하라며 소리를 빽하고 질렀다. 차에서 강아지를 꺼내서 안아 들어 드리려고 했다. 얌전하던 녀석이 낯선 아저씨의 손길에는 비명을 질렀다. 잠시나마 정이 든 걸까? 편안했던 걸까? 아저씨 손에 완전히 넘어가자, 겁에 질린 듯 얼었다. 아저씨는 방으로 데려가 몸무게를 재고, 진드기약을 발라주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비어있는 두 개의 케이지 중의 하나로 넣었다. 산에서 꼬리를 흔들던 하얀 아기 강아지는 순식간에 그들 중 하나가 되었다. 강아지는 여전히 얼어있었고, 다른 개들은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으르렁거렸고, 어떤 이는 초점 없이 나를 보았다. 이름 없는 흰 개에게 인사를 하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이내 얼었던 긴장을 풀고 내 손을 핥으며 꼬리를 한껏 흔들었다.
“밥 잘 챙겨 먹어…”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내가 그를 놓고 온 것은 잘 살린 걸까 죽인 걸까? 지금 나는 잘 산 걸까 죽은 걸까? 내가 한 것은 구조일까 포획일까? 꾹 참고 있던 눈물이 차에 올라타자 터져 나왔다. 시동은 키만 돌리면 손쉽게 걸렸고, 발끝으로 커다란 차는 금세 움직였다.
”망할 생명중심주의.. 인간 중심주의.. 개체 중심주의.. “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울고 있는 내게 친구는 뭐 그런 소리를 하면서 우냐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
그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구조라는 이름으로 철장에 가둬놓는 현실 그것보다 더 나은 현실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 참담했다. 눈물은 후회도 자책도 아닌 속상함과 슬픔이었다. 그런데 내가 슬픈 게 너무 웃기고 싫다. 실은 어제 아침 엄마가 틀어놓은 동물농장에서 개 식용 반대 논리를 들으며 코웃음을 쳤다.
“생명을 사랑하는 이라면 이런 일이 계속되지 않을 수 있는데 힘써야 합니다.”
지금도 쉬지 않고, 인류의 숫자보다도 두 배나 많은 생명을 가두고, 학살하고, 강간하는 축산동물에 대한 현실은 쏙 빼놓고 개에 대해서만 생명 사랑을 호소하는 논리에 어이가 없다며 비웃었다. 그런데도 그 보호소의 개들을 보면서 이렇게까지 슬퍼하는 내가 너무 웃기고 싫었다. 나는 개를 왜 이렇게까지 사랑하는가? 그러면 안 된다. 어느 한 종을 특별대우하면 안 되는 존재니까. 그러면 인간 예외주의에 동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축산동물이 도살당하기 직전의 모습을 지켜보며 연대하는 ‘비질’에 간 적이 있다. 무시무시한 숫자의 돼지들이 커다란 차에 실려 도살장으로 들어갔다. 그중 눈이 마주친 이를 기억한다. 그 눈빛에서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또 다른 반려견 챔프가 세상을 떠나기 전 눈빛이 떠올랐고, 그전에 살던 공동체에 있던 강아지 곰이가 물어 죽인 닭들이 죽어가며 보여주었던 눈빛이 떠올랐다. 죽이고, 또 살릴 힘이 있는지도 모르는 존재가 인간이라 하지만, 죽음 앞에서, 학살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실제로 있는가? 내가 하기로 선택한 일은 그 눈을 피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생에는, 내가 그로 태어나서 다시 한번 눈을 마주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보는 것뿐.
죽여야 한다 살려야 한다. 단순한 논의로 들어가버리는 순간 그동안 인류가 해왔던 이분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도덕에 기대어하는 운동, 죄책감에 기대어하는 운동, 인간이기 때문에 윤리적이 여야 하고, 더 인간적인 무언갈 찾아다니는 운동,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동시에 눈앞에 있는 생명이 죽어가는 모습은 고통스러운 것은 분명하다. 끔찍한 죽음을 목격하고도 태연하게 육식하는 이들은 나도 본 적이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리도 나 또한 그와 비슷한 행동한 적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들의 죽음을 그저 고통스러운 전시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는 고통과 죄책감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동물이 되는 운동이다.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고 걱정하는 것을 넘어 같이 있는 운동. 사실은 그 하얗고 작은 존재를 구조해서 보호소에 가두는 대신, 같이 그 산속에 같이 앉아서 풀도 먹고 흙도 먹다가 천천히 죽어가는, 풀 바닥에 누워 서로에게 붙은 진드기 물린 자리를 긁어주는 삶을 살고 싶었다. 가부장제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폭력이 우리 - 여성, 남성, 성소수자, 장애가 있는 이, 유색인종, 축산동물, 반려동물, 나무, 땅, 모든 미생물과 바이러스를 강간하고, 죽이고, 내던질 때도 나만 도망가겠다고 하지 않고, 피하지도 않고, 섣부르게 재단하고 판단해서 바꿔내려고 하지 않고, 그곳에 머무르며 옆에 있는 삶. 기꺼이 그렇게 마음을 낼 수 있는 삶. 운동을 넘어선 삶으로서 살아가고 싶다. 내게 비건이 된다는 것은 한 명도 죽이지 않겠다는 무해함에 대한 추구가 아닌 살고 싶은 삶을 꿈꾸는 과정에서 선택이다. 비건으로 살아가는 동안 생명이 더 이상 죽지 않기를 바라기보다, 그것보다 우리가 얼마나 더 타자를 위해서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어디까지 불편해질 수 있는가, 그런 자들이 어떤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 질문을 해보고 싶다. 바람이 있다면, 계속해서 어디가 목적지 인지를 잊지 않기를. 죄책감이 아닌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