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는 밤

by 샴스 Shams


열다섯. 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는 유일한 시간이었으므로. 적막의 시간엔 종종 글을 썼다. 주로 외로움과 슬픔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미움이었다.


그런 점에서 잠 못 이루는 밤은 의미가 있다.
그것만이 영혼을 외적인 충격 없이 놀라움과 두려움,
판단과 슬픔을 그대로 표출시키게 만들어준다.

- 헤르만 헤세 ‘잠 못 이루는 밤’



영숙씨와 함께 살게 된 건 두세 살 무렵의 일이다. 뭇 90년대 생들이 그렇듯 가장의 사업 실패로 빚이 생긴 집안사정으로 결혼까지 하며 벗어나고 싶어 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영숙씨는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강제동원을 피해서 혼인을 했고, 전쟁통에 아이 다섯을 낳아서 길렀다. 외도에 사업실패, 알코올중독인 남편을 견디며 살아낸 생존자다. 부잣집에서 자랐다고 했는데, 그래서 결혼 후 그 고생을 한 게 억울했는지, 화가 났는지,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그게 누구든 소리를 빽 질렀다. 이를 앙물기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세상은 너무 가혹했고. 이를 물어야 하는 일은 수도 없이 많았다.



물론 영숙씨의 마지막 손녀인 나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본인은 넷이나 아들을 낳았는데, 다섯 남매의 자식 중 두 명을 빼고는 여덟 명이 딸이었다. 마지막으로 나온 애가 손자도 아닌데, 아무리 뭐라 해도 좀처럼 조신해지지 않는 건 안 그래도 화가 많은 그를 돋웠다.



“너는 여자애가 대체 뭐 하는 거냐? 머스마 같이 굴지 마라”



그는 자신의 삶의 기구함을 소리를 지르면서 풀고자 했다. 삶에서 몇 안 되는 통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무엇이었을 테다. 모든 것이 손 위의 모레처럼 흘러나가는 순간, 뭐라도 붙잡고자 하는 공허한 비명이었다. 그의 기구함을 이해할리가 없는 아이는 더디게, 그러나 꾸준히 쪼그라들었다. 함께 기구한 일생을 맞이하며.



그는 낮시간에는 주로 밭에서 일을 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텔레비전을 보았다. 정파방송 시간을 제외하고는 끊임없이 티브이소리가 집안을 메웠다. 듣고 싶지 않은 티브이소리를 막으려 문을 닫고 이불 속에 들어갔다. 오래된 문틈 사이로 새어 흘러 들어오는 소리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나에겐 할머니가 필요했다. 나를 안아주는 할머니.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할머니. 내게 괜찮다고 말하는 할머니. 나를 보고 웃는 할머니. 나를 칭찬해 주는 할머니.



그건 어른이 필요한 거기도 했다. 밑도 끝도 없이 우습게만 여겨졌던 내게, 그래도 삶을 살다 보면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너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야. 이런 말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해줄 만한. 그러나 바랄 수 있는 건 오직 혼자가 되는 것뿐이었다. 문 밖의 발걸음 소리도, 티브이소리도 끝날 즈음에 진짜 하루가 시작된다. 그 시간을 ‘잠 못 이루는 밤’이라 이름 붙였다. 나에게 뭐라고 하는 이도, 시끄러운 티브이도, 도로가에서 들리는 차가 달리는 소리도 모두 잠들었다. 두 평도 안 되는 작은 방에 나 홀로 있다. 어두웠지만, 반짝이는 무언가가 묘하게 공존한다. 비로소 자유롭다.



‘20살이 되자마자 반드시 독립할 거야.’



잠 못 이루는 밤의 일기장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적혔다. 독립해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나의 공간은 어떤 모습일지. 적고 또 적고, 마음속에 되뇌고 또 되뇌었다. 이 집구석을 떠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찌 하늘이 알았는지 기도는 빨리 이루어져,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반년만에 고질병이었던 스트레스성 구토를 더 이상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더 이상 야심한 시간까지 깨있지 않아도 나로 존재할 수 있었다. 살아있다는 감각을 처음으로 느낀다.



생생한 삶의 감각을 따라서 살아간 지 15년. 영숙씨가 아프다는 소식에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이제 잠 못 이루는 밤은 그에게 찾아온 듯했다. 많은 것이 여전했고, 또 여전하지 않았다. 거동이 불편하여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고자 했지만, 꼬장꼬장한 성격은 어디 가지 못해 여려 명이 일을 그만두었다. 처음에는 호기롭게 일을 시작한 이들도, 시도 때도 없이 밭일과 집안일을 시키고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에. 까다로운 입맛과 성격을 맞출 수 없어서 떠났다. 엄마는 결국 직접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고 영숙씨를 모셨다.



그러나 부쩍 쇠약해진 그는 나를 괴롭게 하던 그가 아니었다. 나는 이제 그가 두렵지 않았다. 그가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짜증과 역정이 가득했지만.


“그래.. 결혼을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지. 결혼해서 좋았던 건 하나도 없었어.”


“사람은 기술을 배워야 해.”


“너희 엄마한테 너무 미안하다.”


종종 그동안은 상상할 수 없던 말들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어색하기만 했다. 나는 달라진 영숙씨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좀처럼 알지 못했다. 일생을 그를 미워하면서 지냈는데, 화내고 짜증 내는 얼굴 뒤에는 늘 다정함이 있었다니. 그것을 알게 되었다고 그가 나에게 상처 준 시간들이 해소되는 것도 아니었고, 그로 인한 내 속의 트라우마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부터 쌓아 올라갈 그에 대한 인상들은 조금씩 달라져야 했다. 그는 이제 노인이었고, 죽음을 앞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일생을 만든 사람이고,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배움들을 아주 조금씩이나마 풀어놓고자 했다.



그리고 그가 결국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그 상실을 예상했지만, 막상 맞이하니 그의 자리를 진실로 느낄 수 있었다.


집안의 남성들이 다 일찍 돌아가신 덕에, 언제나 큰 어른은 할머니이었다. 캥거루족보다 한술 더 뜬 리터루족이 되어 결혼 후 독립했다가 다시 오래된 집으로 들어가서 살고 있는 우리 가족으로서는, 우리의 생존의 문제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말도 안되게 오래된 집이라 이제는 다 나갔지만, 한때는 10여 가구 정도가 할머니에게 세를 들어서 살았다.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었음에도 나름 집주인 할머니의 손녀딸로 사글세를 사는 사람들은 모두 내게 잘 해주었다. 명절이면 선물을 들고 할머니를 찾아오는 이웃들도 있었다. 그의 찬란했던 젊은 시절에는 피란에 육아에 남편 뒷바라지에 맘 편했던적 한번 없었겠지만, ‘집주인 할머니’가 되셨을때는 조금 마음이 놓이셨을까? 그래서 그런지 그는 누구보다도 매서웠다.


엄마는 비록 쇠약한 노인이었을지언정 할머니가 계셨을때는 나를 지켜줄 누군가가 있다는 느낌이었다고한다. 하지만 할머니를 보내고 나니 아버지란 존재를 견재할 수 없어 두려움이 엄습했다고. 엄마를 단단하게 지지하고 있었던 이는 바로 그였다.


“따뜻한 할머니는 품어주지만, 까칠한 할머니는 해방시킨다“


언제나 떠올리면 “무섭고, 어렵고, 괴롭고, 도망가고 싶다.”와 같은 감정이 먼저 들었던 그에게 점점 “안쓰럽고, 안타깝고, 어쩔줄 모르겠다.” 같은 말이 붙더니, 이제 돌아가시고 나니 우리는 ‘해방’이라는 단어로 그를 묘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조금은 우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느하나 틀린말도 없었다.


어쩌면 내가 제일 무서워한 이가 할머니였다는 사실이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까칠 그 자체였지만, 그가 분노를 삭이지 않고 표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삶을 살았다는 것, 그리고 그가 내 어린시절 만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여성이었다는 것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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